<주기도문> 즉,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문장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주기도문으로 이는 단순한 기도의 모범을 넘어, 의도적으로 설계된 '신학적 교정 장치(theological corrective)'이자 '신앙 교육의 틀(didactic framework)'로 동작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암송에 심취해 주문(呪文, incantation) 마냥 읊어대는 경우마저 많다. 여기에서 더 어그러진 것은 (특히나) 우리 사회에 가득한 ‘청구 행위’와 기도를 혼동하는 행위다. 신에게 청구서를 발행하듯, 자신의 요구 사항들을 쏟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당당함을 발휘하는 것은 어쩌면 오늘날 (특별히)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과 깊이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막무가내 식의 주술행위와 신앙을 혼동하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암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기도문은 그 문맥적 배치, 구조적 우선순위, 그리고 어휘적 선택을 통해, 인간 중심의 외식적·거래적 기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최우선으로 하는 “하나님 중심적(theocentric)” 세계관으로 기도자를 재정립시킨다. 나는 주기도문을 '신적 외교(Divine Diplomacy)'라는 해석학적 렌즈와 전통적인 '구조-주해적(structural-exegetical)' 으로 읽어내어, 이를 통해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 원리가 현대 교회의 자기중심적 기도 경향에 대한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해보고자 한다.
주기도문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 그 전례의 핵심이다. 그 간결함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세대를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의 입을 통해 암송되고 있다. 그러나 이 보편적 익숙함은 종종 그 안에 담긴 급진적이고 의도적인 신학적 구조를 간과하게 만드는 역설을 만든다. 현대의 많은 기도 생활이 '나'의 필요와 욕구 목록을 나열하는 '거래적 기도(transactional prayer)'로 변질되는 경향 속에서, 주기도문은 그저 경건한 암송문으로 소비될 위험에 처한지 오래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의 샘플'이 아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Οὕτως οὖν προσεύχεσθε ὑμεῖς)"는 예수의 명령 속에 담긴, 하나의 신학 교육이다. 때문에 그 구조 또한 결코 임의적이지 않다. “마태복음 6장”의 문맥 속에서, 더 확장하면 마태복음에 정리되어 있는 ‘산상수훈’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잘못된 경건을 교정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며, 그 순서와 분량, 어휘 하나하나가 기도자의 세계관을 '나'에게서 '하나님'으로 전환시키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신학적 구조물이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중심부에서, 예수께서 당대의 그릇된 경건 행태를 비판하시는 논지의 정점으로 제시된다. 마태복음 6장 1-8절에서 예수께서는 두 종류의 실패한 기도 모델을 제시하신다.
첫째는 '위선자들(οἱ ὑποκριταί)'의 기도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πρὸς τὸ θεαθῆναι αὐτοῖς)"(마 6:5) 기도한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 θεαθῆναι는 '구경거리가 되다', '관객에게 보여주다'는 의미를 가지며, 영어 단어 'theatre'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소통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보여주려는 하나의 연극(theatrical performance)이었다. 그들은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공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이방인들(οἱ ἐθνικοί)'의 기도다. 그들은 '중언부언하며(βαττολογήσητε)', '말을 많이 하여야(ἐν τῇ πολυλογίᾳ)' 들으실 것이라 믿는다(마 6:7). 이는 그들의 전승이 신을 무지하거나 인색한 존재로 상정하고, 인간의 양적 노력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거래적(transactional) 신관을 전제한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성이 부족하다’라는 무당들의 훈계나 샤머니즘적 전승이 아니어도, 거의 모든 ‘종교적’ 성격을 띈 문화 전반에서 접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신접(神接, Mystical Self-Decep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물, 많은 말, 반복적인 표현, 트랜스 상태에 빠져 웅얼거리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아마도 보편적이라 할 만하다. 내가 神接을 ‘mystical deception’이라 번역한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모델을 모두 거부하며, 그 이유로 주기도문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구절을 제시하신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οἶδεν γὰρ ὁ πατὴρ ὑμῶν ὧν χρείαν ἔχετε πρὸ τοῦ ὑμᾶς αἰτῆσαι αὐτόν)"(마 6:8). 이 선언은 기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기도는 무지한 신을 '알려드리는' 정보 전달 행위도, 인색한 신을 '설득하는' 거래 행위도 아니다. 기도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주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와의 관계적 소통이며, 그분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춰나가는 ‘신뢰의 행위’이다.
바로 이 신학적 전제 위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명령과 함께 주기도문이 제시된다. 따라서 주기도문의 구조—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간구가 먼저 오고 인간의 필요에 대한 간구가 뒤따르는 구조—는, 앞서 비판된 인간 중심적 기도의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교정적 장치이자, '아시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신학적 질서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완벽한 모범이다.
주기도문의 교정적 역할은 그 구조 분석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먼저,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9 Οὕτως οὖν προσεύχεσθε ὑμεῖς·
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ἁγιασθήτω τὸ ὄνομά σου·
10 ἐλθέτω ἡ βασιλεία σου·γενηθήτω τὸ θέλημά σου,ὡς ἐν οὐρανῷ καὶ ἐπὶ γῆς·
11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
12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
13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10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여 주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현대 그리스어 발음은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의 공식 전례(Liturgy)에서 사용하는 표준 발음법이며, 신학적·학술적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에라스무스식 발음(Erasmian pronunciation)과는 차이가 있다. 이 음성 파일은 현대 그리스어 발음법으로 낭독되었다.
현대인들이 종교를 생각할 때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 사람들이 오늘날의 과학문명을 이룩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종교라 폄하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신을 상상하려 든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다른 관점을 취할 줄 모르고, 메타인지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무지일 뿐이다.
<주기도문>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이 가르침이 2천년전 고대 근동에서 있었던 사건임을 숙지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시하셨지만 이것은 예수의 공생애 중 가르침을 통해 일관되게 소외된 자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사역과 맞닿아 있음을 생각해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원수를 사랑하라”, “뺨을 돌려대라”는 표현 등에서 그러한 흔적들이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고대 절대군주 앞에서 백성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왕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자 잠재적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항상 어려웠는데, 그러던 중 몇 년 전 발견한 것이 <귀멸의 칼날>에 등장하는 키부츠지 무잔(鬼舞辻 無惨)의 하현 혈귀 소집 장면이다. 나는 이것이 군주와 그의 지배하에 있는 이들 사이의 관계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주의 판단에는 어떤 변명도 가능하지 않다. 단지 군주의 능력을 드높이는 찬미와 감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꺼냈지만, 사실상 <주기도문>은 이 위험을 상쇄하기 위한 완벽한 외교적 프로토콜을 구현한다. ‘모세오경’의 맥락, 특별히 <신명기>나 <출애굽기>와 복음서의 접점을 상세히 살펴본 경험이 없다면 이러한 접근이 왜 중요한지 알기 어렵다. 사실상 ‘성서’가 강조하는 ‘우상’이란 나의 욕망을 긍정하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한다. 또한 ‘오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신과 나와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는 오늘날 수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행위들과 연결되는데, 애초에 고대근동의 문화나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지 못한 채, 한반도의 샤머니즘적 정서로 신과 나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자기중심적 한계에 빠진 한국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방인들(οἱ ἐθνικοί)'의 기도가 보여주는 전형인 것이다. 잠자는 신에게 나의 필요를 알리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소리와 짜증나는 반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보면, 한국교회의 신은 잠에 빠져있는 우상인 것이다
신학자들은 주기도문을 크게 두 부분, 즉 2인칭 '당신(σου)' 중심의 '당신-간구(Thou-petitions)'와 1인칭 '우리(ἡμῶν)' 중심의 '우리-간구(We-petitions)'로 나누어 분석해왔다. '당신-간구'(마 6:9하-10)는 청원의 위험을 상쇄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물(tribute)'이자 '1차 안전장치'이다. 기도자는 자신의 필요를 아뢰기 전, 왕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높임으로써 자신의 무해함과 충성심을 증명한다. 이는 "저는 당신의 통치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백성임을 먼저 증명하며, 저의 충심이라는 공물을 바치오니 너그러이 여기소서"라는 의미를 담은 정교한 헌사다. 이러한 두터운 안전장치를 마련한 후에야 비로소, 기도자는 '우리-간구'(마 6:11-13상)를 통해 자신의 필요를 조심스럽게 '끼워 넣는다'. 그 내용조차 개인의 부귀영화가 아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보급품(양식, 관계 회복, 보호)'으로 한정된다. 이는 간구의 무례함을 최소화하고, 그 목적이 개인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기도가 간구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없지만, 2세기 초의 '디다케(Didache)'에서부터 나타나는 송영(Doxology), 즉 "ὅτι σοῦ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καὶ ἡ δύναμις καὶ ἡ δόξα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ἀμήν."(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완결성을 보여주는 '2차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이 마지막 찬미는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청원의 무례함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이 모든 대화의 최종 기억이 '백성의 필요'가 아닌 '왕의 영광'으로 남도록 만드는 완벽한 마무리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주기도문의 내재적 논리가 필연적으로 왕에 대한 찬미로 귀결되어야 함을 이해하고 송영을 덧붙인 것은, 주기도문의 하나님 중심성을 확증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1) '당신-간구':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과 선언
2) '우리-간구': 신적 주권 안에서의 공동체적 필요를 간구
<주기도문>은 기도의 순서가 곧 신학적 우선순위임을 명백히 증거한다. 찬미는 단순한 경배가 아니라 위험천만한 청원을 여는 필수적인 '공물'이며, 간구는 개인의 욕망이 아닌 왕국 백성의 생존을 위한 '보급품 요청'이다. 이 모든 기도의 근저에는 존엄한 '절대군주'이시자 동시에 우리를 자녀 삼으시는 '아버지'라는, 경외와 친밀함의 역설적 조화가 자리한다.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 만연한 기복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 생활에 대한 강력한 신학적 도전이다. 현대 기독교의 기도는 종종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해주는 도구나 문제 해결사로 전락시킨다. 주기도문은 이러한 기도의 전도를 바로잡는다. 기도는 나의 문제 목록을 아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으로 시작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멋대로 청구서를 작성해 예수의 도장을 훔쳐 날인하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주기도문을 단순히 암송하는 것을 넘어, 그 구조와 정신을 자신의 기도 생활을 형성하는 '지도'로 사용하는 실천이 요청된다. 기도의 시작에서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나의 필요를 아뢰기 전에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을 구하며 초점을 전환해야 한다. 나의 필요 역시 '우리'라는 공동체적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모든 간구를 마친 후에는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하며 마무리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신자는 기도가 나의 뜻을 관철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작은 세계를 깨고 나와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와 그분의 영광스러운 통치에 참여하는 '관계적 외교'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이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노자 도덕경 4장, "象帝之先(상제지선)" 읽어내기 (0) | 2025.02.12 |
---|---|
패러다임 쉬프트와 더불어 창세기 읽기 - 고대근동 신화들 속 창세기 (0) | 2025.02.09 |
왜 그들은 태극기,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가? (0) | 2025.01.27 |
음모론(conspiracy)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0) | 2025.01.23 |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뿌리깊은 탈북민 정서 – 서북청년회와 한기총의 역사적 맥락 (2) | 2024.12.20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