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지평을 이야기하며 …
붓다가 침묵한 논의들과 쿠르트 괴델(Gödel)의 불완전성 정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다. 그러나 양측 모두가 우리 인간의 지적 한계에 관한 가치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붓다는 어떠한 질문들에 관해 이들이 매우 허망하며 결과적으로는 다시 고통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괴델은 우리가 수학과 논리의 명확한 지배하에 있을 때 조차 증명이 불가능한 진리가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붓다의 침묵과 괴델의 정리는 동일선상에서 이야기 될 수는 없으나, 두 경우 모두 인간지성의 한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함께 볼 만하다.
두 경우 모두, 우리 인간의 이성이 닿을 수 없는 의문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함께한다.
이 두 이야기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통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사람의 입장에는 중요한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양측 모두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에 관한 이해에 관한 통찰을 가져다 준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들은 우리 지식과 관련하여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언제나 더 배워야만 하는 것들이 존재하게 됨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우리 스스로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 놓여 있으며 자신이 믿는 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맹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붓다의 침묵은 붓다가 대답하지 않았던 '특정한 질문들'과 관계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질문들은 현실의 속성, 개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어떠한 영혼과 같은 대상의 존재론적 기술 그리고 사후의 삶 등이 포함된다. 붓다는 사실 이러한 질문들이 궁극적으로 대답 가능한 것들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며, 이들은 결국 괴로움으로 이끌 흔히 말하는 '삿된 견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침묵'은 불교 가르침의 중점이 되는 지점들을 형성한다.
불교는 현실의 궁극적 속성이라는 것은 인간 이해 너머의 있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가 인간의 가장 깊은 통찰 자체도 결국 감각과 경험에서 비롯되는 조건적 형성을 바탕으로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 그 자체를 가감없이 인식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불교는 우리의 신념과 욕망에 대한 집착들이 우리를 고통으로 이끈다고 본다. 신념은 일견 건전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너무나 자주 진리를 향한 새로운 단계들을 발견하고 수용하는데 방해요소로 동작한다. 결국 이러한 '저항'은 고통을 향해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단순하게나마 아우르면, 이것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향해가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수단으로 지혜와 자비를 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혜와 자비를 얻는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 때로는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성립시키는 -- 수많은 요소들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메타적 사고'를 통해 우리의 지성, 통찰을 관조한다면 이러한 불교의 관점이 얼마나 타당한지 이해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붓다의 침묵은 위에서 이야기 한 방향을 향해 가기 위해서 열린 생각을 갖도록 하는 강력한 방편(方便)이었다.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붓다의 침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어떠한 궁극적 현실인식이라는 것은 인간 이해 너머에 있다는 관점에 근거한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겸손의 실천이며, 이 세상에는 우리 인류에게 '항상 더 배워 나갈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늘날 우리의 세상은 항상 폭발적인 정보의 공급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알지 못하는 가 즉, 이 시점에서의 우리 자신의 무지에 관해서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신념에 대한 집착
붓다의 침묵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념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는 결국 괴로움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된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신념에 집착하여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집착은 결국 분열과 분쟁을 낳는다. '붓다의 침묵'의 주요한 측면은 바로 새로운 앎에 대한 열린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우리에게 타인의 신념에 대한 존중이 가질 것을 종용한다.
오늘의 세상을 한 번 돌아본다면 어떨까?
오히려 넘쳐나는 정보들을 기반으로 편향을 강화하고 자신의 주장과 욕구를 관철하기 위한 정보를 그러한 '편향적 방법'을 통해 쌓아가면서 그것들 -- 자신의 편향 -- 을 수정할 수 있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그것들 통해 더 나은 앎을 추구하는 기회를 스스로 내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붓다는 자신을 괴로움으로 이끄는 앎의 추구가 해로우며, 그러한 의문들에 대답하기 보다 정말 찾아야 하는 것들과 그 길을 따르라는 메시지를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행동 즉, 침묵하는 지혜는 과거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이며 실천인지도 모른다.
괴델의 정리는 1931년 쿠르트 괴델(Kurt Gödel)에 의해 처음 증명된 것으로, 당시 수학계와 그때까지의 수학적 진리와 그 토대를 향한 심오하고 강렬한 도전을 던지게 된다.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자. 노트가 하나 있고 거기에는 어떠한 수학적 아이디어나 수학 문제를 적을 수 있고, 규칙을 통해 게임을 하듯 계속해서 적어나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면 어떨까? 이 노트에 온갖 종류, 모든 분야의 수학 문제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그 게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괴델의 불안정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는 이러한 도구들을 앞에 둔 당신에게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공식이나 규칙이 등장하는가의 여부와는 관계 없이 언제나 마지막에 가면 마치 최종 스테이지, 최종 보스라 여겨졌던 관문을 넘으면 숨겨진 스테이지와 숨겨진 보스가 나타나듯 지금까지 사용했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끊임 없이 풀어야 하는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참(true)'인 수학문제의 증명은 그 수학문제의 규칙을 통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한 답이나 혹은 이미 답이 존재하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결과값이 참인 수학명제의 답이 참이라는 증명은 그 명제를 구성하는 내용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괴델이 보여준 것은 수학 규칙 그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새로운 단서를 향해 끊임없이 새로운 의문들을 생성시키지만, 결과적으로는 결코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는 수학과 논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충분히 강력한 형식체계로 그것이 참임을 증명하는 명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참인 이유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체계는 불가능하다는 것, 즉 특정한 체계는 그 제쳬 자체의 규칙만으로는 스스로가 참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알고 있듯 "이 진술은 증명가능하지 않다 This statement in unprovable"는 문장이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이 언어형식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문장임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우리가 이것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언어의 규칙들을 사용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델의 정리(Gödel's Theorem)는 우리에게 이것이 언어의 규칙들 안에서는 증명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명제는 자기지시적이며, 그 명제 자신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델의 정리와 인간의 지식체계
괴델의 정리는 인간의 지식체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것을 지적해준다. 가장 빈틈없고 강력한 형식체계를 확립하더라도 결국 어떠한 진리들은 그 형식체계 안에서 증명할 수 없으며 그 밖에 있는 것들을 통해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체계의 현실적 한계성은 어찌보면 인간이 가진 지식의 한계라는 것이 항상 있는 것이며, 저 밖에는 끊임없이 열린 지평의,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이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시 말해, 어떠한 진술이 잘못되었다면 그 진술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확인된다. 이것은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일으킬 수 있다. 즉, 어떠한 진술이 틀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라는 것, 반대로 어떠한 진술이 참이라는 사실이 참임을 확인하는 것은 항상 의문부호가 따른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형식체계는 그 형식체계가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괴델의 정리는 결국 인간의 이성과 앎이 닿을 수 있는 세계 너머에 항상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도록 만든다. 매번 이것을 넘으려는 시도는 다시 그것을 넘기 이전의 결론으로 향한다.
괴델의 설명과 붓다를 향한 질문은 모두 모순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향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논리적 체계나 언어가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우리의 가정(혹은 확신)에 대한 도전으로 작동한다. 붓다와 괴델은 모두 자기지시적 역설이 포함되는 경우 전통적인 참/거짓 개념이나 증명 혹은 증명불가와 같은 이분법적 방식이 아닌 훨씬 복잡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종국에 가면 우리의 지성과 형식체계에 내포된 표현들이 곧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들 모두가 진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라는 경계와 관련하여 복잡하게 얽힌 의문들을 다시 던져주는 것을 통해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확인하도록 종용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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