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예술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나 이것을 생물의 ‘종(種, species)’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많은 단서들을 찾는다. 특별히 누적적인 인간의 문명이 갖는 특징에 근거해 ‘인문학(the humanities)’에서 그 단서를 찾기를 열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나는 간혹 어떠한 철학적 주장이 제논의 역설(Zeno’s Paradoxes)과 같은 사태를 야기한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논리적으로 성립이 될 듯 하지만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마치 버그 혹은 잘못된 프로그래밍 같기도 하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많은 경우 이런 경우와 유사한 문제들을 따라갈 때 사람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경험적인 세계(empirical world)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한반도 문명에 정말 오랜 기간 영향을 준 ‘불교’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향한 다양하고 통찰력 있는 지적들을 그 핵심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불교에 대한 공부에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로 시작하는 이유는 철학자 화이트헤드 Alfred N. Whitehead 가 그의 저서 <과학과 근대세계>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요약되며, 그것은 이 내용 즉 “예술이 인간을 정의한다”는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 또한 그렇다. 그렇기에 화이트헤드의 개념을 인용하며 계속할까 한다.
왜 어느 순간부터 인류는 사진의 분비물이 아닌 어떠한 상징 symbol 을 통해 사진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을 선택했을까?
가장 구체적인 것이 바로 동굴벽화에 남긴 손바닥이다.
이러한 동굴 벽화 손바닥은 우리의 지능이 ‘언어적 구조’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간단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을 ‘손’이라는 상징으로 단순화시켜 정보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고서는 이러한 행동이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지표 index 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에 대입되는 개념의 이해에서 출발한다. 공동체 지향적으로 발달하는 인간의 지능이 ‘언어적 구조’라는 고등한 사고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유추 analogy’라는 지적활동의 폭을 엄청나게 넓힌다.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은 인간 뿐만 아니라 자연계 거의 모든 생물들이 가진 능력이다. 가장 단순한 생물들 조차 생존을 위한 에너지를 향해 나아간다. 세포를 분열하거나 조금 더 복잡해지면 생식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실천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유전자 등의 방법을 통해 생물에 누적되어 간다.
인간과 여타 다른 생물들과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 누적의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사회성에 기반을 둔 언어적 구조라는 사고의 틀은 이러한 누적의 주기를 엄청나게 줄인다. 에너지의 사용방식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내연기관을 기본으로 사용하는 동력장치 즉, 엔진을 생각해보면 작은 파이프 안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지만 그 에너지 분출 방식을 이용해서 큰 에너지를 만는다. 흔한 4기통 차량은 100마리 가량의 말이 낼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러한 자동차의 엔진은 엄청난 열과 함께 배출물을 쏟아낸다. 즉, 내연기관이 에너지를 내는 방법은 자연현상에 근간을 두지만, 일반적인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급속도의 에너지 소비를 하기 때문에 각종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자동차 엔진룸에 들어있는 작은 엔진이 약 100마리 말의 힘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지능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이 자연상태에서 수 억 년 동안 얻을 수 없는 능력을 고유한 신체 기능을 벗어나 다양하게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능력 즉, 지능에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있다. 모든 동물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격차가 생긴 능력이다. 바로 유추와 시뮬레이션이며 그것의 고도화다. 그리고 이러한 고도화는 개념화 능력을 통해 얻어진다. 이러한 개념화 능력 중 인간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상징의 활용이며, 이 상징의 활용은 언어와 수학 같은 더 정교한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의 부작용과 같은 것으로, 단순히 자전적 기억 autobiographical memory 과 광범위한 미래 유추에서 비롯되는 걱정의 일상 같은 것 외에도 생겨난 것이 있다. 바로 개념적인 것, 추상적인 것과 사실을 일치시키는 경향이다.
비가 내린다/ 꽃이 핀다는 표현은 아주 일상적으로 거부감이 없는 문장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이 자체가 어떠한 특정한 사태 즉 행위와 대상을 분리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실상 자연 그 자체와 상당히 이질적이다. 비는 내리는 사태로만 존재하며, 꽃은 피어있지 않을 땐 꽃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항상 항진명제적 주부/술부의 분할을 가져가는 것을 완성도 있는 문장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국어원 같은 곳의 '꼰대질'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언어는 애초에 사실 기술에 '바르게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그 기본적인 특징으로 인해 자연은 있는 그대로, 경험도 있는 그대로 경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오히려 경험되는 세계를 환상으로 자신들의 상상 속에 그린 추상적 이상세계를 본질로 보는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의 태도를 보인다.
비가 내린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면 인간의 언어가 매우 이상하다는 점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나와 상황 그리고 타인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고도화 되었을 때 누적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을 선택해 메시지에 보편성, 항상성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언어가 일종의 바디랭귀지 즉, 지사(指事)의 방법일 때부터 이미 충분한 추상화의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손가락 혹은 몸짓이 사물 자체가 아닌 상징하는 대상물이 있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행동 주체와 사실 기술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이미 충분한 언어적 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과정은 정교한 음성 언어와 문자를 통해 누적되고 확대되는 과정을 거치며 일종의 ‘향상’을 거친다. 언어의 기본 구조가 보편화되고 널리 퍼지면 그만큼 가용한 의사소통 범위가 넓어진다.
이러한 인간 언어의 발전과 확산은 거대한 문명 사회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인간이 세상을 매우 왜곡하여 바라보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는 그리스 철학에서 매우 극명하게 등장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이후에 등장하는 그리스 철학은 경험되는 세계를 일종의 환상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약 100년 후 플라톤(Plato)과 같은 철학자의 등장과 더불어 심화된다.
나는 ‘이데아’와 같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분리된 본질의 세계가 있다는 주장에 매우 큰 거부감이 있다. 이것은 오히려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종’의 위치를 망각하며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는 언어적 구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즉, 세상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분리하며 일어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소위 ‘단일방향적 인과’라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완전한 세상의 근원(혹은 기원)이 있고 시간이 지나며 오염되거나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후 인간의 근원을 이루는 어떠한 존재(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는 불완전한 이 세계에서 완전한 이상세계로 옮겨간다는 식의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
그러나 매번 강조하지만 이렇게 시점과 종점 그리고 중간 과정을 상정하는 것은 어떠한 심오하고 고등한 세계에 관한 통찰이 아니라 생물이 에너지를 얻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지능에 그 근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의 구조를 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항진명제적 중복 기술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가 내린다”와 같은 문장의 표현이 그렇다. 내리지 않는 상태에 있는 비는 없다. 사실 ‘비’라는 명사와 ‘내린다’는 동사는 근본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주부-술부의 문장구조를 이용해 주부-술부로 왜곡되는 기술을 통해 완전한 문장을 만든다. 영어에서는 rains 라는 동사를 사용하지만 it 이라는 가주어가 사용되기에 우리말보다 더 강력한 분리가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인도유럽어족 Indo-European Language 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대개 우리가 알고 있는 영혼, 사후세계, 윤회에 관한 관념들이 대부분 인도유럽어족 문화권에서 등장한다. 셈어족 등의 문화에서 바라보는 사후세계의 그림은 매우 다르며, 구약성경에서 ‘영혼’으로 번역되는 단어들은 그리스,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그것과는 굉장히 다른 개념이었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로 사진 연작을 구성해 2019년 이화여대에서 열린 이화-루스 국제세미나 STC 현장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https://www.bhangyoungmoon.com/polyhedrons
각종 몸짓을 통해 상대에서 어떠한 ‘상황’을 기술해야 하는 시점,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시점부터 언어적 구조에 의한 분리 즉, 주부와 술부의 분리는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가 세계를 불변하는 ‘주어’의 세계와 움직이는 ‘술어’의 세계로 ‘착각하는’ 매우 큰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실상 언어와 예술은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즉, 사실로부터 개념 혹은 추상적 분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벽에 찍은 손바닥 자국이 자신이 이곳에 있었음을 상징한다고 여기는 것은 분비물을 이용해 영역의 표시를 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행동이다. 벽에 그린 소와 초원을 거닐고 있는 소가 다르지만 상징적 일치를 갖는다는 점의 이해, 거울을 바라보며 거울 속의 상 image 이 나의 복제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인간과 다른 존재의 ‘합성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경험되는 세계와는 다른 어떠한 개념적 세계로의 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후 수많은 야만적 행동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실상 인간과 사자가 뒤섞인 형상, 소와 인간이 뒤섞인 형상의 상상은 바로 나와는 다른 ‘타자’의 상정 그리고 그것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자기인식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예술적 행위란 다른 인공물을 기획하고 만드는 행동과는 매우 다르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뚫는 것, 강아지가 물건을 자신의 주변으로 나르는 것, 비버가 댐을 만드는 것 등과 다르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사물에 정보를 주입하고 자신이 원하는 용도를 만든다. 대형 유인원과의 동물들은 도구를 이용해 열매를 따고, 복잡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사실과 개념을 분리해 누적적으로 정보를 축적해 나가는 행위는 아직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가 싶다.
즉, 사실과 추상 혹은 사실과 개념의 분리 능력은 인간의 인식론적 오류의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인간만이 가진, 인간을 정의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우리의 지능이 임계점을 돌파하며 어느 정도 문장의 구조를 형성해내고도 수 십 만 년 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4만여년전,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바닥이나 나무에 어떠한 추상물을 기획하고 구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언어와 예술행위는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분야별로 완벽하게 분리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분야나 행위가 그렇지 않은가? 학습, 연구, 모델링 등을 위해 분과주의적 접근의 효율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함몰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을 정의한다.
사실과 개념의 분리,
사실과 추상의 분리라는 고도의 지적 활동의 근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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