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선(船)자와 노아의 방주
먼 옛날 물의 신 엔키(에아)는 우트나피쉬팀에게 “거대한 배를 만들어 커다란 홍수에 대비하고 이를 통해 땅 위의 생명을 보존할 것”을 명령한다. 우트나피쉬팀은 자신의 가진 것들을 포기하고 ‘생명의 수호자’라 이름 붙여진 이 거대한 배 만들기에 헌신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가족들, 동물들과 곡식들을 싣고 살아남는다.
영국의 고고학자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Assyriologist)는 1867년 토판의 해석을 통해 인정받게 된다. 여기에는 고대 세계의 천문현상과 엘람인들의 바빌론 침공과 같은 당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길가메시> 토판의 대홍수 이야기를 발견하여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현재 이 토판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배 선(船)과 노아의 방주
도대체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1902년 케임브릿지 대학의 중국어 교수 허버트 알렌 가일스(Herbert Allen Giles)가 미국 콜롬비아 대학에서 <CHINA AND THE CHINESE>라는 제목으로 가진 강연을 통해 우리는 배 선(船)과 노아의 방주를 처음 연관지은 것이 18세기 예수회 수사들(Jesuit Fathers)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이들이 처음 舟 "ship," 八 "eight," 口 "mouth" = eight mouths on a ship—"the Ark." 라는 공식을 만든 사람들이다.
가일스 교수는 (주지하다시피) 형성자의 우측은 상형과는 관계가 없으며 예수회 수사들의 이러한 해법은 중국어의 어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18세기 예수회 수사들의 중국학(Sinology)에 대한 열의는 존경하지만 중국의 글자 형성사, 한문의 구성방식 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해석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형성자의 특성상 한문의 우측은 단순히 '발음' 부분이며, 심지어 가일스 교수는 이 부분은 '납 연(鉛)'이라고 설명한다.
(이 강연은 당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현재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를 통해 전자책으로 열람할 수 있다)
'연(㕣)'을 사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논란이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물이 한 곳에 모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흐를 유(沇)에 의해 대체된 문자다. 이 글자의 구성은 상단은 물길을 하단은 공간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현재 '둘레'를 의미하는 위(圍)로 사용되는데 이 글자의 상형은 본래 '囗 (위, wei)'였다. 위(圍)에서 원래 의미 부분은 바깥쪽 사각형이며, 의미상 '가죽'에 해당하는 위(韋)가 발음에 해당한다.
어원적으로 이러하지만 많은 사전에서 현대의 형태만 놓고 八과 口를 적고 있어 혼란이 가중된다.
로랑 사가르(Laurent Sagart)는 프랑스의 언어학자로 동아시아 언어들의 다양한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배 선(船)가 동사(verb)로 사용되는 따를 연(沿)에서 도출된 명사(noun)로 본다. 따를 ‘연’은 ‘강을 따라서 간다’는 의미에서 온 것으로 보며 이것은 중국이 한(漢)제국 시대가 되면 주(舟)보다 더 주된 표현이 된다.
배 선(船)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시점은 <설문해자 說文解字>다. 이 글자는 갑골문, 금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시대적으로 배 선(船)이 '방주'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시간적으로 상당히 긴 단절 이후에 형성자가 발생한다는 점에서도 '방주'와 배 선(船)의 상관관계는 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주(舟)를 갑골문 등에서 찾아보면 현대인의 눈에는 ‘사다리’를 그려 둔 것 처럼 보인다. 이러한 배의 모양이 카누와 같은 단순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배를 묘사한 상형자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동의될 수 있다. 커다란 배를 의미하는 박(舶)자는 오래된 상형이 없다. 후대에 만들어진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자는 과거로 갈 수록 ‘커다란 배’를 의미하는 글자가 없다는 점을 우선 눈여겨 보아야 한다.
오스트로 아시아 조어와의 관계를 지리적으로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리게 된다. 언어학자 로랑 사가르의 주장과 다른 시노티베탄 조어 속의 ‘배’를 의미하는 어원들 역시 커다란 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노티베탄 조어에 등장하는 ‘배’를 의미하는 문장은 오스트로 아시아 조어와 영향을 주고 받은 것으로 보는 이론이다. 이 언어는 대륙 남부를 중심으로 사용된 언어들의 조상 언어라고 볼 수 있다. 남아시아 이주민들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쌀 농사가 시작되었다는 이론이 있듯이 이들은 상당히 먼 거리를 작은 배로 그룹을 만들어 이동했다고 보고 있다.
지식이란 사회성의 산물, 최대한 많은 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언어학자들의 일치는 배 ‘선’을 구성하는 ‘연’은 ‘늪’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고 보고 있다.
'연(㕣)'의 구성이 여덟 팔(八)에 입 구(口)라 하여 이것이 노아의 가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우선 상형자(象形字)의 형성사를 잘 모른다는 점과 형성자의 구성 원리에 무지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다. 18세기 어원론 연구가 성숙하지 못할 무렵, 상형자/형성자를 구분하지 못했던 선교사들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신학적 논의가 되려면 그만큼 정교하고 또한 깊이가 있어야 할 것인데, 성급한 결론과 얕은 연구의 결과를 가지고 주장하다가 되지 않으면 화를 낼 뿐인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약 300년전, 선교의 소명을 가지고 중국 땅을 밟았던 예수회 성직자들은 전략적으로 이러한 한문 해석을 선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않아 오독으로 밝혀진, 오늘날에는 사실 상당히 케케묵은 이야기일 뿐이다.
대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였다
<길가메시>에 등장하는 우트나피쉬팀은 물론 지우스드라와 같이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고, <노아의 홍수>는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버전이다. 메소포타미아 동남부 삼각주 지대에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이 시작되었는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우르(Ur) 지역은 당시에는 현재보다 10m 이상 낮은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지역들은 먼 옛날에는 더 풍성한 수량과 강의 범람을 경험하는 지역이었으나 초기 정착 농경과 상류의 벌목으로 황폐화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 것으로 조사된 연구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르는 오늘날 중동 사람들 다수가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수메르와 아카드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명들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의 원천이기도 하다. 수메르의 멸망 후 아카드가 들어서며 수메르의 문화들을 대거 수용했다. 기원전 2400년 경 수메르를 정복한 아카드의 왕 사르곤은 정원사와 성전의 사제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당시 어머니인 성전의 사제는 사제의 신분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었기에 아이를 나무 바구니에 역청을 발라 유프라테스강에 띄우고 기도한다. 강에서 목욕을 하던 공주가 강을 따라 내려가던 바구니 속 남자아이를 발견하고 왕궁으로 데려가 키운다. 이 아이가 훗날 사르곤 대왕으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이렇게 고대 세계는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으며 어떠한 공통된 인식을 갖게 되기도 한다.
언어의 역사
인간 의식, 역사 세계에서는 언어의 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꽤나 명확한 ‘기록물’이 존재하는 시대의 인류는 현실적으로 어떠한 개념이나 이야기들이 하나의 단일 뿌리를 두고 자라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간의 언어와 지능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에게 빛처럼 밝혀진 순간의 산물이 아니다. 사회성의 오랜 누적을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인간 언어의 발생과 그 발전사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종교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는 인간의 뛰어난 기억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자전적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에 의해 발현되었다. 죽음에 대한 이해, 죽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의 현재를 고민한 결과인 것이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서부에서는 거대한 조상 숭배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고 조상과 자신과의 관계 증명은 결국 땅에 대한 권리를 의미했다. 이제 막 정착 생활을 시작한 고대인들에게 ‘땅에 관한 권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모세 오경 속에 ‘땅의 권리’가 주장되는 부분이 얼마나 구체적인지를 보면 이 또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권리문서’는 명확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블록체인 blockchain 과 같은 분산원장 기술을 통해 더 정교한 보안이 가능한 시대는 정말 최근에야 이루어졌으며, 여전히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만큼 ‘단일 기원설’은 인간의 사고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히나 고대 근동의 수많은 경전들이 이러한 '권리문서'를 목적으로 사실상 기록된 것들이며 그 방법은 '신화'의 틀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말은 세상의 역사와 개념이 ‘단일기원’을 가졌기 때문에 단일기원이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이 단일기원적 사고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세상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단일기원적 관점을 가진 과학 지식이 부족한 인간들에게 아주 강력하게 작동하는 장치는 바로 '신화'라는 장치다. 적당한 시기, 적당한 곳에서 신의 권위를 보증할 수단만 있었다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가능했다. 고대 세계의 신학은 통치를 위한 것이었으며, 이것이 발전하면 왕정과 국가제도를 위한 것이 된다. 에누마 엘리쉬, 베다, 아베스타, 구약성경 모두가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배 선(船)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한자의 상형문이 대부분 제식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제사를 위해 준비된 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미리 주의를 하고 싶은 것은 ‘평행진화’나 ‘단계를 밟는 생각의 구조’를 먼저 이해할 것을 강력히 권해드린다. 잘못하면 또 초연결적 망상에 빠져서 신화적 해석으로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종교는 권리 주장을 위해 탄생했다. 종교의 정교화는 제식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제식을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체계가 필요하다. 베다를 만든 사람들은 암송구전을 선택했고,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상형문을 선택했다. 왼쪽과 오른쪽은 각각 제기와 제사도구를 들고 있는 자세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나무만 보려하지 말고 숲을 봐야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의 이미지를 가져오면, 어떠한 사건은 강물에 발을 담그는 것 같다. 계속해서 물이 흐르는 강에서 동일한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어떠한 개념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인간의 지능 또한 지성은 사회성의 산물이다. 이는 단독적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외부세계,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때문에 최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의 개념에도 최대한 많은 접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결론을 가리켜 우리는 ‘편향 bias’이라고 부른다.
나는 다른 글들을 통해 ‘아수라(阿修羅)’나 ‘금강(金剛)’과 같은 언어들이 각각 아케메네스 제국과 파키스탄, 인도의 지리적 관계 또한 피노-우랄어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정리했다. 우리는 이들 모두에 신화적 의미를 부여한다. 악신을 쫓고, 금강경을 암송하며 어떠한 심원한 깨달음에 이르길 원하기도 한다.
솔로몬의 친-가나안 정책을 모르면 시편 속 찬송시 상당부분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실 꽤나 충격적이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넣는 까닭은 우리가 단일 기원이나 순수성에 집착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러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이 가진 특성 때문이다. 주역이나 바둑판의 원리, 갑골문이 거북이의 껍데기를 이용한 연유도 실상은 시노티베탄 언어 사용자들이 생각한 우주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미지는 거북이를 제식에 사용되는 문자를 적기 위한 매체로 선택한 매우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철학적으로 구체화 되는 것은 후대의 일이지만 시각적 이미지는 매우 오랜 옛날부터 자리를 잡는 것이다.
기원에 대한 단순화 된 이미지는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또한 인간들이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을 가진 이상 어떠한 이미지가 공통적일 가능성인 매우 높아진다.
영국의 대 문학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멋지지 않을까 한다.
‘There are more things in heaven and earth, Horatio, than are dreamt of in your philosophy’
(호레이시오여, 하늘과 땅 사이에는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