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経, Mahāparinibbāṇa Sutta)에 등장하는 명상가 붓다의 명상지도

Photographer Bhang 2021. 11. 21. 22:37

수천 년의 사례 누적과 현대적인 연구를 통해 우리는 소위 ‘명상 meditation’이라는 행동에 관해 아주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시중에는 다양한 메뉴얼이 등장했고, 이에 관한 연구도 다양하게 등장했다. 공동적으로 보이는 것인 뇌에 오는 다양한 변화가 관찰된다는 것이다. 특히 소위 ‘부정적인 감정’과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기 쉬운 뇌의 구조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일종의 ‘테크닉’이라는 점에서는 꽤나 의견 일치를 보이는 것 같다.

깊은 집중 가운데에 있으면 그 집중이 다가오는 생명에 대한 위협보다 더 크게 느껴질 수 있다(인도 남부 타밀나두를 거닐며)

 

부정편향(否定偏向, negative bias)과 편도체(扁桃體, Amygdala)

인간의 두뇌를 비롯하여, ‘뇌 brain’를 가진 모든 생물에 있어서 뇌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생존을 위한 활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에 그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있다. 즉,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란 이런 기능의 고도화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뇌가 생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뇌를 통해 일어나는 것 뿐이다.

 

최근의 연구는 인간에게 ‘무의식’이라는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러한 영역이 상정되었던 이유는 단순히 인간 의식 자체가 일관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뇌의 디폴트 네트워크(default network) 상태에서는 생각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뇌가 생존활동의 효율을 위한 기관이라는 중요한 증거는 ‘부정편향’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편안하고, 안락한 기억은 아련한 느낌으로 점점 흐릿해져가는 경우가 많으며, 의미가 없는 것들은 아예 사라진다. 그러나 좋지 못한 기억은 아주 강하게 각인되며, 심한 경우 소위 ‘트라우마’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같은 것을 일으켜 일상생활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뇌가 부정적 기억을 강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쾌감의 경우에도 연결해보면 거의 모든 것이 생존의 극대화를 위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살찌는 음식이 맛있고, 신체적으로나 여러 측면에서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진 사람에게 끌리고, 부드러운 천으로 몸을 감쌀 때 편안함을 느끼는 등 인류 문명의 많은 측면이 바로 이 생존기능의 극대화와 속에 있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호’가 반드시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자연계는 기본적으로 필요 이상의 자원을 생물들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인간만이 인위적을 풍성화한 환경 속에 자신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자원, 기후 등 수많은 난관을 만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제 우리 생존을 위해 신체를 효율적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뇌’를 ‘문명’이라는 여건 속에 맞추어 조율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방법론이 존재하고, 다양한 테크닉이 있으며, 훌륭한 스승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인류사 속 최고의 명상가 한 명을 꼽아보라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당연히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붓다를 떠올릴 것이다. 붓다의 명상 만큼 잘 알려져 있음과 동시에 기본적인 경전 내용에 대한 무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해져 버린 체계도 없을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아나빠나사띠 숫따(Ānāpānasati Sutta, 호흡새김의 경, 入出息念經), 마하 사띠빠따나 숫따(Mahā-Satipaṭṭhāna-Sutta, 大念處經) 등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가르침이 등장하는데, 그의 깨달음 이전부터 대각(大覺 Supreme enlightenment)에 이르는 명상의 길이 한눈에 정리되어 있는 내용은 그의 죽음을 기록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 Mahāparinibbāṇa Sutta)을 통해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붓다의 입멸

사람이 가기에 하나의 길도 벅찬데 다른 길은 어떨까라는 의문 자체도 여전히 내게는 시기상조이기에 위대한 스승의 잘 보존된 가르침 하나를 골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도 map’는 아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첫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두 번째 선정에 드셨다.
두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세 번째 선정에 드셨다.
세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네 번째 선정에 드셨다.
네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무한공간의 세계의 성취에 드셨다.
무한공간의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무한의식의 세계의 성취에 들었다.
무한의식의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 들었다.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었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서 나와서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 드셨다.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 드셨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무한의식의 세계의 성취에 드셨다.
무한의식의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무한 공간의 세계의 성취에 드셨다.
무한공간의 세계의 성취에서 나와서 네 번째 선정에 드셨다.
네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세 번째 선정에 드셨다.
세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두 번째 선정에 드셨다.
두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첫 번째 선정에 드셨다.
첫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두 번째 선정에 드셨다.
두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세 번째 선정에 드셨다.
세 번째 선정에서 나와서 네 번째 선정에 드셨다.
네 번째 선정에서 나온 직후 세존께서는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

<Dīgha Nikāya, Mahāparinibbāṇa Sutta> 빠알리어 성전협회 판, 전재성 역 중

대반열반경은 죽음을 목전에 둔 붓다의 앞에서 슬퍼하는 제자들을 향해 늘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을 언어와 더불어 실행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죽음을 묘사한다.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모습은 평생을 성취한 다양한 선정들에 차례대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첫 번째 선정(初禪)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욕계(欲界)를 처음으로 벗어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인식주관의 요(要)가 세상을 바라보는 바탕에 욕탐이 있음을 아는 것인데, 이것으로부터 떠나 지각되는 대상들을 욕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은 사고를 멈추고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상태로 해석된다. 욕탐의 단계에서 감각 자체를 다스리는 상태로의 이행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벗어남(出離)을 통해 평온과 희락을 경험한다고 며, 의식이 이러한 희락 속에서 머물기에 정생희락(定生喜樂)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세 번째 선정(第三禪)에서는 평정의 상태에서 올바른 사띠(sati) 즉, 정념(正念, sammā-sati)을 느낀다. 자신이 선정에서 오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러한 욕구까지 다스려 버릴 때 들어간다. 모든 대상을 평등하게 바라본다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괴로움과 행복 모두가 포함된다. 즉, 모든 것을 한결 같이 대할 수 있기에 일신일상(一身一想)이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한다.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서는 모든 것을 한결로 바라보는 상태에서 벗어난다. 인간의 언어 속 모든 대상과 개념들이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일으킨다는 점을 깨닫고 그러한 관념들에 머물지 않기에 무주(無住)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통이나 행복이나, 불행이나,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기대지 않고 평정한 의식 속에 있기에 사념청정(捨念淸淨) 즉, 양극단에 대한 비움이 있기에 무상무각(無想無覺)의 상태에 이른다. 인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의 바탕이 되는 지점을 찾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선정들은 빠알리어 번역어가 그 상태를 잘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공무변(空無邊), 식무변(識無邊)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공무변(空無邊)’은 공간의 무량함 즉, 색(色 - 물질)이 없고 감각지각 되지 않는 대상의 인식이 있음을, ‘식무변(識無邊)’은 의식의 모든 영역을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는 “무한공간 세계의 성취”로,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ṇañcātana)는 “무한의식 세계의 성취”로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무변’은 물질의 지각이 없을 때 일어나는 관념에 대한 것이며, ‘식무변’은 대상이 없을 때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도 존재할 수 없기에 실상 이러한 인식들은 논리적으로 그 구조에 ‘모순’을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각각이 붓다가 출가 이후 만나 잠시 스승으로 모셨던 두 사람 즉, 알랄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가 개척했던 禪定이 등장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음’의 이해인 무소유처(無所有處,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와 ‘존재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님’의 이해인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다. 흔히 선정(禪定) 속에서 이 두 가지 상태(無所有, 非有想非無想)는 최고의 행복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 바탕이 사라짐에서 어떻게 존재함 혹은 인식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또한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며 조금 거칠게 몰아간다면 감각적 착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유상비무상’에서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데, ‘유’라는 인식에 대비해 ‘무’를 인식할 수 있고, ‘무’라는 인식을 ‘비유비무’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비유비무’는 ‘비비유비비무’ 같은 식으로 계속되는 이중부정, 삼중부정으로 가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철학에서 말하는 무한소급(無限遡及)에 빠진다. 즉, 개념에 대한 반성(혹은 분석)이 계속되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과 경험되는 관찰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 그것을 논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계속되는 소급(遡及)이 무한퇴행(regressus ad infinitum)에 빠지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무한퇴행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붓다의 관점과 당시 베다에서 비롯되는 명상에서의 목표와 관점은 차이가 있다. 알렉산더 윈(Alexsander Wynne)은 <니까야>와 <우파니샤드>, <마하바라타>에서 모두 이러한 무색계 명상에 관한 언급이 있음을 통해 문헌학적 증거로 알랄라 깔라마, 웃다까 라마뿟따와 붓다의 가르침을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무색계 명상들의 경우 그 근본적인 이해는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브라흐만아뜨만에 관한 다양한 '시적 표현'들을 통해 그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붓다가 명상가에게 일종의 '경지'라 할 수 있는 무색계 명상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점으로 이어진다. 붓다가 말하는 '삶 안에서의 해탈'과 더불어 <베다> 즉, <우파니샤드>가 말하는 우주적 합일이라는 목표는 버트란트 러셀이 말하는 배중률(排中律)을 통해서도 그 문제가 드러난다. 버트란트 러셀이나 여타 서구 유럽의 철학자들보다 오래 전 인물인 붓다는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데, 붓다의 관점에서 볼 때 <베다>가 제시하는 목표의 실상은 관념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발생하는 잘못된 견해로 성립하게 된다. 이렇게, 욕계, 색계, 무색계 즉 18계의 문제들은 바로 양립할 수 없는 관념에 빠지며 일어난 문제들이며, 언어적이고 개념적인 관념을 사실과 혼동하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결국 사실과 관념의 일치는 이것들을 존재론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 즉, 집멸(集滅)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작품활동을 해오며 2020년 판데믹 상황으로 많은 작가들이 내놓는 작품들을 바라볼 때 든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거의 전부가 괴로움의 표출이었다는 점이고, 그러한 것들의 표현 활동이라는 점이다. 종종 전통 예술, 특히 국악계의 음악인들과 협업을 할 때 배우게 되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전통 음악의 정서는 ‘恨’이라는 어떤 복합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어 음악에서 그것을 풀어내는 해소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즉, 한(恨)이라는 감정의 복합체는 토양과 같이 해소되는 어떠한 표현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2년이 되어가는 판데믹 상황 속에서의 이러한 예술 활동들은 나에게 다른 의문과 활동 방향을 제시했다. 마치 2,500여년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던졌던 ‘왜 살고, 늙고, 병에 들며, 죽음을 맞이하며 그 전 과정 속에서 괴로워하는가?’라는 의문과 이에 대한 해결의 방법을 고민하고, 제시했던 것처럼, 다른 의문, 다른 방향, 다른 이해, 다른 해결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었던 것이다.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2,500년도 더 지난 문명의 성취 시대를 사는 우리가 논리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성취하는 것’이다. 붓다의 위대함이란 그것을 찾아내고 실천적이고 반성적으로 깨달아 자신의 본성으로 만들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손으로 붓이나 목탄 혹은 펜을 잡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미학 이론적 바탕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연마된 다양한 테크닉에도 아주 능숙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수행들의 실천적이고 반성적인 지점에서의 이해를 통해, 판데믹은 물론 인간의 수많은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관련한 공감 이상의 표현이 작품 속에서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