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원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 숟가락이 없다고?

Photographer Bhang 2020. 12. 23. 22:46
Spoon boy: 
Do not try and bend the spoon. 
That's impossible. Instead... 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Neo: 
What truth?


Spoon boy: 
There is no spoon.


Neo: 
There is no spoon?


Spoon boy: 
Then you'll see, that it is not the spoon that bends, it is only yourself.

 


이 대화는 선문답(禪問答)이 아니다. 
어찌보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
환에서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야 말로 가장 심각한 환이다.


숟가락은 그것을 일으키는 조건이 달성될 때 나타나며 그 조건이 사라지면 스러진다.

눈앞에는 특정한 조건에 적절한 분자조합이 있고,

우리가 그것의 다양한 물질적 상태를 이해하면 '숟가락'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숟가락 하나도 있다 혹은 없다의 판단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원리란 있다 혹은 없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集) 스러진다(滅)에 있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 인식(consciousness)의 장과 상호작용을 하는가에 있다.


이 장면을 보며 선문답(禪問答)이 떠오르는가?

선은 언어를 통한 이해를 파괴하는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중국인들의 '언어에 대한 불신'이 선(禪, zen)을 만들어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따라서, 이 '선'을 탄생시킨 문화는 실체와 본질을 이분화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남는다, 나 자신이 남는다는 식의 접근과 발상은 정말 선문답과는 거리가 먼 사고방식이다.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공성(空性)은 모든 견해를 제거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공성을 견해로 갖는 자는 구제받기 어렵다고도 했다.
- Nāgārjuna(नागार्जुनः, 龍樹)

"우리 모두가 습관적으로 실재(實在; reality) 토대라고 믿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기대할  없이 모순된 생각이다. 독립적 존재란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관사상은 부정되는 (독립적 존재) 분명하게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중관사상에도 사물들과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정확하게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하는가이다."

- <불교와 양자역학>, 빅 맨스필드

 


문화와 역사를 통해 보는 선(禪, #zen)의 탄생

인도-아리안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인도 아대륙에 들어오게 된다. 기원전 1,500년 경에는 인도 북부를 떠도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100년 경에는 갠지스 평원에 정착해 농경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기원전 500년 경이 되면 고대 인도의 거대한 지적, 사회적 동요가 일어난다. 인도 각지에서는 새로운 생각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는 베다 전통에 근거한 우파니샤드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 각기 진리를 추구하는 사문(Śramaṇa (Sanskrit: श्रमण; Pali: samaṇa) 沙門)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계급주의적인 브라만들과는 달리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사문들은 브라만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대신에 대중의 언어인 프라크리트어를 사용했다. 초기 불교의 언어인 팔리어도 프라크리트어 즉, 속어(俗語)의 일종이다. 붓다가 태어나 활동했던 시기는 브라만 전통에 근거한 베다의 제식들이 수많은 의문을 만나는 시기다. 이 시기가 인류가 '철기문명'으로 진입해가는 시점이다. 

매일 아침 브라만들의 제식이 해가 뜨게 만든다는 생각이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 앤드류 올레 Andrew Ollett 는 프라크리트로 보기에는 불충분한 언어들로 이는 단순히 중기 인도-아리안어 The Middle Indo-Aryan languages 의 일종으로 보아야 하며 고대 인도에서는 실질적으로 프라크리트로 불리지 않았던 언어들의 목록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팔리어와 불교식 혼종 산스크리트어가 포함된다. 국내에 불교 연구와 관련해 일반적으로 돌고 있는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다.
    일부 독일 학자들에 의하면 프라크리트는 특별히 문학을 위한 언어였던 것으로 보여지며(대중들의 여흥을 위한 작품의 언어였다는 의미인듯), 프라크리트가 사용된 극작품과 문학작품의 사례를 제시한다.

따라서, 
사문 운동에서는 불을 이용하는 베다의 전통적인 제식들은 
진리, 간소화된 의식, 평안, 인내와 같은 도덕적 개념으로 재해석된다.

선(禪, #zen)의 문화적 배경

<벽암록(碧巖錄)>의 공안도 달마와 양무제의 대화로 시작된다. 달마는 칸치푸람(காஞ்சிபுரம், Kanchipuram) 출신이다. 인도의 남부로 현재는 '첸나이 Chennai'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권역이라 볼 수 있는데, 이곳은 베딕 즉, 아리안들의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드라비다 계통의 언어인 타밀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다. 나는 이러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그가 중국에서 선불교의 조사로, 다양한 전설이 등장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선(禪, #zen)이 형성되는 배경과 그 과정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베딕에서 형성된 고대 인도-아리안 문화에서 출발
  • 산스크리트어, 후기 베다의 완성
  • 사문(Śramaṇa (Sanskrit: श्रमण; Pali: samaṇa) 沙門) 운동의 발발
  • 불교는 처음 팔리어로 전승됨
  • 불경의 산스크리트어 전승은 쿠샨 왕조에서 시작된 후대의 일이다
  • 인도 불교 28대 조사, 선불교 조사인 달마(போதிதர்மன், 菩提達摩)의 등장
  • 달마는 남인도 칸치푸람(காஞ்சிபுரம், Kanchipuram) 출신
  • 칸치푸람은 타밀어(드라비다어족) 지역
  • 베딕, 고대 산스크리트어, 마가다어, 팔리어 그리고 타밀어으로 연결되어 온 과정
  • 달마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와 선불교를 형성했다고 봄

이것이 선문답이었다면, 

소년: 숟가락은 없어요.
네오: 그래? 없어? 너 이 숟가락으로 맞으면 아파 안아파?
(숟가락을 들어 소년의 이마를 내리친다)
소년: !!!!

언어가 가진 구조로 인하여 인도-유럽어 화자는 무언가 '본질'이 있고 나타난 세계는 '거짓' 혹은 '표면'이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물론 이런 접근이 다양한 분야에 걸친 발전을 이끌어 낸 것이 사실이다. 유럽인들은 많은 갈등 속에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인도인들은 내적 탐구를 통해 소위 말하는 '나를 찾는 여정'의 거대한 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간에 발을 헛딛는다면 신비주의와 현실부정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 प्रतीत्यसमुत्पाद, dependent arising)이기 때문에 공(空)하다는 사실은 세상을 거대한 환(幻, maya)으로 취급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보아야 맞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은 거대한 환상이다'라는 쪽으로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닫힌 결론은 항상 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거대한 유혹이다.

현실을 환상의 일종으로, 본질 세계를 더 깊은 세계로 보는 시각은 전형적인 선형적 인과 linear causality 관점이며 이것은 불교의 기본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용수(나가르주나)가 인용한 붓다의 가르침은,

공성(空性)은 모든 견해를 제거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공성을 견해로 갖는 자는 구제받기 어렵다고도 했다.” 

이는 곧, “숟가락이 없다를 견해로 갖는 자는 구제 받기 어렵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빨간약은 보드리야르가 아니라 군터 안더스 Günter Anders 적 접근이다

사실 너머 '그 무언가'를 느꼈다고 해도 그것은 대개 우리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미는 그것이 구현되었을 때 생긴다. 진실이나 실체를 파헤치겠다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놀라움이란 평소 생각없이 살았던 사람들의 게으름에 가해지는 경고다. 깨달음과는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매트릭스의 빨간약을 운운하며 장 보드리야르를 인용하고 있는데 실상 그들은 군터 안더스 Günter Anders 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바람처럼 안더스는 가상의 문제를 깨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나타나는 것을 긍정한다. 가상을 깬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매트릭스의 결론이다. 

매트릭스의 결론이 허무하다며 그 안에 아무 철학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애초에 접근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 매트릭스는 그 나름대로 충실한 근거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숟가락은 없다" (2): 대중문화 속 철학적 전유

영화 《매트릭스》의 상징적인 장면, "숟가락은 없다"는 오랜 시간 우리에게 현실과 환상, 깨달음과 미망의 경계를 되묻게 했다. 네오가 소년의 말을 통해 매트릭스의 규칙을 초월하는 법을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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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저서

네오가 디스크 등을 감춰두는 용도로. 그런데, 이 장면의 등장은 사실상 함정이다. 요즘은 이들을 어찌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워쇼스키 패밀리(?)가 장 보드리야르를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의 중요한 키워드로 삼았다면, 그렇기 때문에 매트릭스를 극복하고 현실 세계로 빠져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것 뿐이다.

왜냐하면,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진실'을 부정해버린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 
-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中 

 

현실이란 무엇일까?


생각이 발달해 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이 현실 밖에 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싶어하게 된다. 그러나 이 우주 전체가 #시뮬레이션 #Simulation 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 밖을 논한다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아니, 설령 이 모든 것이 가상이라고 해도 몇 가지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우리에게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쓸모도 없게 된다.

다음의 4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경험은 그것이 현실임을 입증한다. 

1. 충분한 정보
2. 현재(초기) 조건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
3. 미래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
4. 노이즈

Any experience that meets the following four conditions prove that it is indeed a reality.

1. Sufficient information
2. Impossibility of understanding the present conditions
3. The unpredictability of the future
4. Noise

 

생각의 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바로 인과를 단일방향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관념으로 공(空, emptiness, nothingness)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어떠한 현상세계를 환(幻, māyā)으로 보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일방향적 인과, 제일원인, 부동의 원동자 혹은 존재론적 인식에 대한 거부를 말하는 것이며, 어떤 심층의 혹은 단일한 근본실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며, 인과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 dependent arising)

불교의 인과율은 자신과 세계가 서로 원인이며 결과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얽혀있는 시스템이며 선형적인 연쇄작용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며 이것이 처음 정리된 언어에서는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문법적으로 아주 세심하게 배려되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팔리어 문장은 이것이 저것을 산출하거나, 저것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사의 처격이 사용되었다. 우리말로 가장 가깝게 옮긴다면 '~ 때문에'가 아닌 '~ 할 때'가 되는 것이며 '조건성'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사건들이 단순히 공간적, 시간적 접촉 혹은 인접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문법적 세심함은 번역과 해석의 과정에서 상당히 변질되었다.

초창기 아비다르마(阿毘達磨, Abhidharma)적 해석에서도 항상성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순간성'을 도입했다. 이것은 본질주의적 사고로의 '퇴행'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설일체유부는 실체와 속성을 구분하는 실수를, 경량부 학자들은 '찰나'를 강조하며 이것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이들 <논장>의 성립 이전에는 실체라는 개념과 같은 형이상학적 분석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또한 정신과 물질의 구분의 시도를 하여 또 한 번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했다. 선형적 인과율 비판 기능이 상실되고, 실체와 속성이 구분되어 인과의 단일방향성이 생겨났다. 이렇게 되면 사실 베다나 이후에 성립하는 힌두교와 구분이 사라지는 셈이다.

붓다의 경우, '연기' 자체는 고정된 도식으로 기술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은유 혹은 통속적인 비유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한 도식화를 했던 것인데 바로 이 방편들을 붓다 입멸 후 제자들이 개념적으로 고착화시키면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매트릭스를 해석하는 대부분의 관점이 불교와 거리가 멀다

조애너 메이시는 마루야마를 인용하여 아낙시만드로스의 하나의 원형적 실체(proto-substance)라는 개념, 아낙사고라스의 영혼, 질서, 합리성과 동일시 되는 동력실체(power-substance)라는 관념,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와 연역적 사고로 귀착의 문제를 지적한다. 매트릭스를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 대입해보자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환상이며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매트릭스에서는 매트릭스 밖의 세상, 즉 우리가 생물학적 몸으로 직접 경험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런 방식은 불교적 해석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을 '선문답'이라고 보는 것은 장면의 메시지 자체를 왜곡시킨다.

 

그런데 매트릭스의 "숟가락은 없다"라고 하는 장면을 다시 자세히 보자.

"당신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쯤되면 사실 요가차라(Yogācāra, 有識)적 접근을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윤회의 주체가 되는 아뢰야식(ālāyavijñāna, store-house consciousness)은 불교에서도 중관학파와 그 관점이 많이 달라 분쟁이 발생했다. 사실 이 부분은 참 모호한데, 마음 뿐이라고 하는 것과 이것을 한 일본학자의 표현처럼 '근본심'이라고 보더라고 결국 하나의 존재론적 실체를 두는 것이기에 아비다르마나 부파불교의 해석적 문제에서 발전한 개념이지 이 또한 붓다의 오리지널에 충실하다고 보기는 좀 어렵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자꾸만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역시 매트릭스를 환(幻, māyā)의 세계로, 이 세계를 대하는 나의 마음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적 접근을 한다면 매트릭스 속의 현상이란 매트릭스와 나의 상호작용이다. 더 나아가서 매트릭스라는 시스템의 존재는 바로 인간과 기계와의 상호작용이다. 후에 아키텍트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네오와의 대화는 인간과 기계가 상호의존적 상태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꾸만 매트릭스 속 상황을 착각이나 환상으로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지금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모든 인과의 제 1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그 자체로 완전한 실제이다. 시온의 해방주의자들이 왜 계속해서 매트릭스에 접속해야만 할까? 이러한 설정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상세계와 다른 어떠한 세계를 엿보았다고 한들 결국 그러한 세계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왜 자꾸만 플라톤의 동굴 같은 해석으로 가게 될까?


인도 철학에서도 이 문제는 그리스 철학과 비슷한 문제에 빠진다. 베다 시대에서는 이후 다르마(dharma)라 불리우는 어떠한 관념을 리타(ṛta)라고 불렀으며, 변화는 이 현상들 속에 내재하는 잠재적인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잠재적인 힘을 스와다(svadhā: 고유한 힘)라고 불렀으며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 안에 내재하는 힘 또는 특성으로 여겨진다. 외적 요인을 요구하는 그리스 철학이나 이후 유럽의 교부철학과는 거리가 있기에 이것을 매우 다르게 본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또한 현상의 제 1원인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는 기본적으로 언어에 집중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북방에서 이주한 아리안들의 영향이다. 이들의 이동 경로 등을 통해 오늘날 유럽, 인도 그리고 이란의 언어들의 기원과 관련된 깊이있는 연구가 이루어진다. 그리스의 경우 초원에서 아나톨리아 - 크레타 - 그리스로 동선을 그려보는 것이 어렵지 않고, 인도의 경우 파키스탄 지역을 거치는 남진, 터키와 이란을 거치는 남진의 동선을 그릴 수 있다. 창세기와 신명기 등에서도 등장하며, 후대 인도의 신들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는 '밋타니'라는 왕국 또한 중요하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 바로 인도-유럽어 Indo-European Language 라 불리우는 거대한 어족의 화자들이라는 것이다. 사고의 심층화, 고등화 그리고 네트워크와 의사소통의 핵심에는 바로 이 '언어'가 있다. 그렇다면 언어의 구조는 사고방식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경우에도 '깨달은 자'인 붓다 이후에 일어나는 혁신은 상당부분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 지역이 아닌 드라비다어족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나가르주나의 출생지로 여겨지는 인도 남부 지역이라는 곳은 오늘날 '텔루구어' 지역이며, 禪宗의 조사로 여겨지는 달마 대사의 경우 칸치푸람 출신으로 보고 있는데, 이 지역은 '타밀어'를 사용하고 있다. 텔루구어와 타밀어 모두 드라비다어족에 속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 철학과 그리스 철학의 인과관이 유사한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통해 어떻게 사고방식이 발생하는지에 관해서는 한 작품에 대해 동영상을 만들어 설명한 것이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매트릭스의 메시지

왜 우리는 매트릭스 The Matrix 라는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플라톤의 동굴'을 생각하게 될까? 몇 번을 보아도 매트릭스의 메시지는 본질과 현상을 가른 그리스 철학에 대한 반발로 보이는데 말이다. 그것은 자꾸만 '기득권이 나를 속인다'는 오늘날 많은 이들의 정치적 사고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가 초반에 나오는 것만 보아도, 영화는 어떠한 현상세계 즉, 매트릭스가 비본질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드리야르의 저서가 등장하는 초반 장면을 통해 매트릭스와 본질세계를 연결하고 싶어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보드리야르를 읽지 않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유튜브'에 등장하는 리뷰들이 실상 보드리야르가 아닌 안더스(Günter Anders)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애초에 환(幻, māyā)의 미망을 넘어 진실의 세계로 가자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밀며 인류를 구원하자는 모피어스는 신실한 믿음을 보여주지만, 그 자신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할 때가 있다. 또한 기계들과의 협상이라는 매트릭스 3부작의 결론은(4부가 나온다고 하니 어찌되나 보자) 모피어스가 상상했던 것과는 매우 달랐던 결론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온'에 남겨진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미는 모피어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영화는 그 나름 자신에게 충실한 근거를 가지고 진행될 뿐이다. 자꾸만 불교적 해석의 틀을 강요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가 불교적 측면을 포함한다고 해서 해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해진 The One 이 필요한 것이 워쇼스키들의 생각일지, 대중영화의 한계성일지는 직접 묻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다.

영화의 불교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매트릭스를 불필요하며, 벗어나야 하는 세계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네오가 매트릭스 밖에서도 기계들을 세우는 순간은 바깥 세상이 특별히 어떤 '본질적 세계'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이미 세계는 인간과 기계가 매트릭스라는 상호작용의 장(field)을 이용하지 않으면 서로 스스로를 존속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인간에게도 기계들에게도 생존을 위해서는 매트릭스가 답인 세상이다. 아키텍트의 방에서 등장하는 네오의 수를 보면 이미 기계들이 매트릭스를 구축한 것은 굉장히 오랜 세월이 지난 상태다. 이러한 상호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스미스 요원(Agent Smith)의 존재야 말로 어찌보면 가장 문제였다. 고효율, 말끔한 질서, 단일화, 단일기원 등의 심볼 같은 스미스 요원이 인간과 기계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 설정은 매트릭스의 메시지 중에서도 매우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결론

숟가락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두고,
우리가 숟가락을 환상으로 정의하고 '본질의 세계'를 보려 한다면 영화가 애써서 만든 세계관과 메시지를 모두 놓치는 것이다. 그러한 접근은 선문답도 아니고, 불교적 세계관도 아니며,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영화나 저 옛날 인도의 붓다가 깨고자 했던 번뇌의 근원인 제 1원인과 존재론적 집착에 대한 도전을 하라는 메시지와도 거리가 멀다.

한차원 높은 혹은 더 본질적인 세계가 있어
우리는 그 위에 비춰진 투사된 상과 같은 세계에 산다는 세계관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오류에 빠질 뿐이다. 

숟가락은 그것을 일으키는 조건이 달성될 때 나타나며 그 조건이 사라지면 스러진다. 눈앞에는 특정한 조건에 적절한 분자조합이 있고, 우리가 그것의 다양한 물질적 상태를 이해하면 '숟가락'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숟가락 하나도 있다 혹은 없다의 판단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존재'의 원리란 일어나고(集) 스러진다(滅)는 것에 있다.

개체는 존립을 위해 우주 전체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