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明滅하는가 혹은 循環하는가?
나는 철학자 화이트헤드 A.N. Whitehead 의 "개체는 존재를 위해 우주 전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이것은 땅위에 떨어진 모래알 하나도 현상태의 우주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명멸하는가?
10의 -27제곱 cm 크기의 약 9파운드의 구체를 유지하던 상태는 왜 일어났는가? 우리는 이것을 알 길이 없다. 明滅을 반복하는 순환하는 구조를 갖는다고 해도 매번 다를 수 있음은 충분히 가능한 추측일 뿐만 아니라, 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전에 어떠했는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그 시작의 이유나 근거에 대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각종 접근 - 실험, 시뮬레이션, 창조 - 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대답은 '모르겠다'일 것이다.
나는 순환하는가 - 다시 태어나는가?
한강물 중 어떤 하천은 서해로 어떤 하천은 동해로 흘러간다. 바다로 들어간 물은 소금기를 먹은 바닷물이 된다. 그 바닷물 중에서 한강에서 흘러들어간 물이 증발해 비구름이 되어 한강에 비를 뿌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한강에서 흘라나간 하천으로 이미 다양한 물이 유입되었고, 바다로 들어가며 또 수많은 물과 만난다. 분명 물은 순환하지만 자신의 출처를 주장할 수 없다. 언젠가 비가 되어 한강에 다시 내려 한강물이 된다는 것은 한강물이 한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어느 물이 유입되고, 증발하고, 다시 내리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실상 '나'를 정의함에 있어서 모호함이 있을 수 밖에 없듯이, 우주를 정의함에 있어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윤회한다는 확신은 '나'와 보펀젹 현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나의 실상이 그러하듯이 우주의 실상 또한 그 모든 것을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일회적으로 태어나고 죽는가?
태어나고 죽는 주체인 '나'의 연속성은 실상 매우 희귀한 확률에서 비롯된 현상에 대한 작은 이해다. 사람은 세포분열, 세포의 교체주기, 영유아기 뇌발달에 이르는 모든 프로세스에서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음을 통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방법도 분명 가능하다. 우리는 단순한 세포 상태에서 뇌발달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할 때까지 아주 많은 변화를 겪는다. 나 자신이라는 현상을 유지하는 상황은 미묘한 균형 상태에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나'라는 어떠한 내적존재를 주장하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나'의 시작부터 그 유지는 전부 외부요소에 의해 가능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지구상 대기를 이용해 호흡을 하고, 다른 생물을 죽여 소화시킨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기 유지 활동이다. 자기 유지 활동에 '나'를 이루는 것들은 외부에서 오는 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한다. 다시 가장 간단한 세포의 상태로 돌아가보면, 나를 성립시키는 모든 요소는 나로부터 온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죽는 것은 누구인가?
우주는 일회적으로 명멸하는가?
우주란 무엇인가?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주가 명멸하는지 순환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명멸과 순환의 동시성을 가지고 바라보아도, 현재의 우주와 다르게 순환하는 어떤 이전의 우주를 우리가 이해할 방법이 있는가?
현대 물리학이 보여주는 이미저리 imagery 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실과는 다른 사실 설명을 위한 일종의 은유다. 원자모델에서부터 설명을 위한 용어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와 우리의 경험적 이해를 놓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을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를 넘어서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현대 과학을 통해 계속해서 알아가게 된다. 관찰이 통찰보다 더 깊은 지식의 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모든 것, 그 총체의 명멸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사후세계는 죽음에 대한 거부, 우주론은 자기 주장의 정당성에 그 이유가 있다.
죽음에 대한 이해와 그 거부감은 거의 모든 문명권에 영생의 열망을 심었다. 이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후(死後)에 대한 다양한 서사는 거의 모든 문명에서 도덕적 압력(moral pressure)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나의 불멸은 나의 불변하는 연속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그 근거로 삼고 있음을 이해하는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애써 차가운 현실과 그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더불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어느 순간 도태된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는 사실 또한 새겨야 한다.
생물은 대를 거듭하며 변화한다. 그 방향이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떠한 영속적인 자기 개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 또한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은 옛날 C. S. 루이스가 기독교적 구원론을 변증하기 위해 선택했던 논리이기도 하다.
어떠한 초월적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주가 명멸하고 순환하는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명멸 혹은 순환이 어떠한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거부를 전제로 한다. 또한 어떠한 초월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는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극대화하려는 ‘심보’가 있다.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모든 것의 본래 모습은 존재가 아닌 현상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나 현상론적으로 모순을 내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