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원

9차제정(九次第定)과 6신통(六神通) - 신화적 서사의 필요성

Photographer Bhang 2021. 9. 22. 16:07

나는 지난 여름 37일 동안의 개인전을 통해 떠올린 내용과 이중표 교수님의 <아함의 중도체계>를 기본으로 한, 단행본으로 출간된 <붓다의 철학>을 읽으며 배우게 된 내용들에 추진(推進)되어 새로운 작업들을 구상했고, 오는 12월 해외에서 전시를 예정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을 구상하고 만드는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배움의 과정들을 통해서 삶에 들어오는 새로운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또한 수정하며 때로 어떤 것들은 버리게 된다.


2021.07.20 - 08.26 까지 '갤러리 시소'에서 진행된 개인전 <응시>

 

9차제정(九次第定)과 6신통(六神通) - 신화적 서사의 필요성

프랑스 문헌학자 조르주 뒤메질(George Dumézil)의 주장처럼 신화, 의식, 상징과 관련에 사용되는 언어의 어원들을 세부적으로 이해할수록 그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의 문제가 때로는 지나치게 분석적인 어휘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떠한 선포(Kerygma, κῆρυγμα)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으로 나타나듯이 서사가 전적으로 부재한 분석은 오히려 의미의 배열만 남을 뿐 어떠한 역동성도 갖추지 못할 위험이 생긴다

신화의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인류의 의식 구조의 상당부분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문헌학자 조르주 뒤메질(George Dumézil)의 주장처럼 신화, 의식, 상징과 관련에 사용되는 언어의 어원들을 세부적으로 이해할수록 그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의 문제가 때로는 지나치게 분석적인 어휘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떠한 선포(Kerygma, κρυγμα)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으로 나타나듯이 서사가 전적으로 부재한 분석은 오히려 의미의 배열만 남을 뿐 어떠한 역동성도 갖추지 못할 위험이 생긴다: 한마디로 체계적 설명만으로는 메시지 전달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수의 인도 신비주의 문화는 인도 아대륙에 정착한 북방 아리안들의 문화와 선주민들의 분화의 융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뭉뚱그려 알고 있는 ‘인도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북방 아리안들의 유목민 문화와 인더스 문명을 세운 하라판 문명 등의 선정착민 문화가 오랜 세월 융화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보면 어느 정도는 그 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불교의 체계 또한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면 ‘아, 이런거구나’라고 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이 보인다.

 

9차제정(九次第定), 7식주 2처(七識住二處)

붓다의 깨달음에로의 길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9차제정(九次第定), 7식주 2처(七識住二處) 등으로 불리우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12연기(十二緣起)의 체계와 하나하나 그대로 맞아들어가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이는 8개의 해탈 체계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삼명(三明)은 원래 ‘베다 Veda’를 아는 지식을 의미했다. 여기에 꽤나 무협지적 차력이 더해지면 세간에 흔히 육신통(六神通)으로 알려진 ‘스킬’을 획득하는 것이다. 신족, 천이, 타심은 각각 허공답보와 같은 경공, 초인적인 청력,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말한다. 불교에서 ‘삼명(三明)’이라 하면 숙명, 천안, 누진을 말하는데 이는 각각, 전생을 알고, 어떻게 태어날지를 알며(내생), 번뇌를 말끔히 씻어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7식주 2처(七識住二處)의 체계는 욕계(欲界)색계(色界)의 4식주와 1처 그리고 무색계(無色界)의 3식주와 1처를 의미한다.

붓다가 잠시 스승으로 모셨던 ‘웃다까 라마뿟따’의 개념인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을 마지막으로 7식주 2처의 체계가 맺어진다. “이는 있다는 생각[有想]이 없다는 생각[無想]을 바탕으로 하여 생긴 것이지만, 없다는 생각[無想]이 사라질 때 있다는 생각[有想]이나올 수 있는 것은 있다는 생각도 없다는 생각도 아닌 미묘한 생각”(이중표)을 경험하는 경지를 말하는데, 바로 이러한 ‘유무의 체계’야 말로 모순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깨달은 붓다는 이를 떠나 ‘멸진’(滅盡)을 성취한다. 이를통해 ‘무명’(無明)이란 이 세계가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함을 설한다. 즉, 상존하는 것은 세계라고 인식되는 현상을 일으키는 원리이며 그 위에 우리가 ‘있다’고 알게 되는 것들이 나타난다.

  •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세상을 일종의 환상이나 착각으로 설명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어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시리즈를 이해할 때도 유사한 관점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한 층위가 환상이고 그 너머에 본질세계가 있어 그곳을 향해 나아간다는 마음이야 말로 우리에게 번뇌(煩惱)를 심는 태도다. 본질과 표층은 서로 이어지며 독자적으로 상주(常住)할 수 없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이 사라진다. 데카르트적 독립적 존재의 인식은 ‘번뇌’인 것이다.

이것은 12연기라는 체계에서 욕망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취하려 하며, 갈애가 일어나고, 그러한 욕망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느낌을 만들고 선호를 만들게 될 때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어 감각적으로 수용되는 ‘실체’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다루게 되는데 실상은 이것은 존재론적 대상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단계로 이는 무명의 세계 즉, 이 세계가 ‘서로 연하여 일어나는 원리’ 위에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며, 이러한 상태는 결국 한 인간에게 있어 하나의 세계가 자신의 욕망의 투영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연기(緣起)의 체계는 9차제정, 7식주 2처와 각각 그 내용이 연결되고 일치한다는 것이 이중표 교수의 설명이다.

 

 

현대인들도 여전히 신화적 세계 속에 있다

토대주의(Foundationalism)적 맹신은 오늘날 많은 이들의 과격한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쓰인다. 이를테면 ‘측정의 문제’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는 자를 대고 어떤 것의 길이를 말하고, 저울을 이용해 어떤 것의 무게를 말한다. 그러나 장하석 교수의 말처럼 “몇 도라고 하면 뭐가 몇 개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은 잘 갖지 않는다. 측정과 통계의 문제가 어떠한 '객관적 입장'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러한 생각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1 미터(meter)는 어떻게 정하는 것인가?

이는 1793년에 남북극과 적도 사이의 거리는 천만 등분한 것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빛이 1초 동안 진행한 거리를 2억 9979만 2458으로 나눈 길이로 정해졌고, 가장 최근에는 플랑크 상수를 이용한 기준법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지구의 크기와 남북극 적도 사이의 거리를 천만으로 나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렇게 등장한 방법으로 다시 빛이 1초 동안 움직인 거리를 등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찌보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순환논리에 불과하며, 항진명제의 틀을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실질적으로 1미터라는 단위와 그것을 통한 측정은 아무런 정보도 내포하지 않는 것이다. 1미터는 어떻게, 왜 정한 것인가? 순환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러한 정의와 설명이 우리가 바라보는 인식세계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작품을 통해서도 인간의 시각 인식이 얼마나 부정확한지를 보여준 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측정하는 눈금 같은 것들이 제대로 된 것임은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사실 정확히 보면(正見) 확신할 수 없는 사실들에 확신에 차서 몰입하고, 그것을 근거로 상대와 논쟁하고 더 나아가면 갈등하고 싸우게 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확신하는가? 오히려 우리의 수많은 결정들은 우리 자신의 실존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에 우리는 모든 결정 앞에서 겸허해야 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토대주의적 확신에 차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맹신하고 더 나아가면 다른 것들을 도덕적으로 비판한다.

 

 

신화적 서사의 필요성

현대인들도 토대주의라는 신화적 서사에 빠져있다.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 십 년 자기 인생 계획을 세워두고 그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간다.

 

과거에 비해 개명한 시대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 또한 신화적 서사 속에서 허우적 댄다면,

그렇다면 고대에는 어땠을까? 

현대 과학의 정밀측정과 그를 토대로 하는 통계, 논리적 정밀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들이 ‘토대주의 맹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면 도량형조차 지금보다 훨씬 정교하지 못했던 옛날 사람들은 과연 자기 주장을 어떻게 했을까? 자기 주장의 당위성, 정당성의 근거를 어디에서 끄집어 낸 것인가?


신화적 서사의 필요성은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의 탈신화화(Entmythologisierung)나 조르주 뒤메질(George Dumézil)의 관점과는 또 다른 측면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논리적 당위성’이다. 

 

이러한 체계들을 이해할 때, 우리는 고대 인도의 철학들이 그리스의 귀납/ 연역과 같은 논리학, 유물론, 이분법 등과 다르지 않은 것이 대부분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체계와 내용면에서 그리스 철학과 전혀 다르지 않은 고대 인도의 철학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연구되고 해석된 방법의 차이로 인해 매우 신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질 때가 있다. 근현대 자칭 영적리더들의 태도는 이러한 이질감을 더 심화시켰다. 

 

내가 2018년 작품을 구상 할 때 중요한 모티프였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등과 같은 저술은 ‘대화’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고대 인도철학에서는 4대(四大)라고 했던 세상을 구성하는 기초원소에 관한 논의가 여기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등장한다. 플라톤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위해서 ‘기하학’이라는 방법을 가져온다. 이집트인들이 땅을 경작하고, 도시를 계획하고 또한 피라미드 같은 건축을 하기 위해 사용했던 기술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자기 주장과 우주의 원리를 보여주는 토대(foundation)가 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토대를 증명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우주의 원소들이 정다면체 구조를 갖는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원소들의 시각화가 가능한 오늘날 어느 정도 그렇게 보여지는 경향이 발견될 수는 있겠지만 실상으로 따지자면 판타지 문학에 가깝다. 대화의 과정을 통해 기하학적 근거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우주의 진리에 다가서려는 진지한 서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인도로 돌아와보자.

항시 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의 문화는 공통적으로 이러한 ‘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스라엘의 시소인 아브라함의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다. 신과의 계약은 신이 제시한 제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러한 제식은 이집트 탈출 후 부족이 민족을 이루었을 때 정교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방 아리안 문화 또한 ‘제식’ 중심의 전통이었다. 신타시타(신타슈타)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들 유목민들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접경지역에서 항시 전쟁에 시달리던 사람들이었다. 고고학자 데이빗 앤서니(David Anthony) 교수는 신타시타 문화를 인류 최초의 이륜전차를 발명한 문화로 보고 있다. 이를 신타시타인들의 기나긴 이주는 중앙아시아 지명에 ‘탄’자를 심고 시리아에 ‘미탄니’라는 왕국을 세웠으며, 훗날 능숙한 전차술로 페르시아와 같은 국가의 기반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란’ Iran 이라는 지명은 바로 이들이 스스로를 칭하던 명칭 '‘아리안’들의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식은 신과의 계약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제식의 정교화와 더불어 경전을 통해 사제의 행동을 하나하나 메뉴얼화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사제에 의한 정교한 제식이 아닌 집안의 가장이 사제의 역할을 겸하던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제식이 신과의 약속을 행하는 장(field)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리안들의 제식은 다른 의미에서 더 엄격한 측면이 있었다. 이들은 짐승이나 사물 같은 제물 뿐만 아니라 ‘말’ 즉, 언어가 신들에게 바쳐지는 공물이라 믿었는데 그러한 찬가(chanting)들의 모음이 베다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 어느 정도 일치되고 있는 해석이다. ‘산스크리트어’조차 민족이나 지명이 아닌 ‘제사를 위해 준비된 언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제식에 사용되는 찬가를 구성하는 단어들은 리시(rishi)라 불리우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역사어원론적으로 보면 ‘브라흐만’이라는 말은 ‘말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힌두교 등에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전변(轉變)의 정점에 있는 ‘브라흐만’은 제식을 위해 ‘말을 만드는 행위’라는 뜻에서 온 단어다. 그만큼 아라안들은 언어에 집착했고, 이러한 엄격함이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긴 세월 동안 음성언어만으로 베다라는 경전은 물론 관련한 문법서를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된다. 즉, ‘인간 책’을 만드는 것이 이들 제식 문화의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추상적 기원을 갖는 ‘브라흐만’, 현실적으로 피노-우랄릭 언어권과의 다양한 뒤섞임이 만들어 낸 ‘인드라’와 같은 신들은 훗날 인도-유럽어 문화권의 제우스, 토르 등과 문화원형이 공유되지만 그 출발이 되는 시점은 매우 소박하고, 일상적인 행위 혹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랜 기간 전쟁을 경험한 신타시타인들은 이주 과정에서도 수많은 전쟁을 했을 것이고 - 이 또한 신명기에 언급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와 비슷하다 - 그 과정에서 ‘힘’을 상징하는 ‘인드라’는 매우 중요한 신이 었을 것이다.

 

이렇듯, 고대인들에게 어떠한 행위나 논리의 당위성의 끝에는 항상 '신들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관측과 이의 기반이 되는 토대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의 눈에 ‘신들의 세계’는 신화적 서사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의 합리주의와 토대주의 또한 불합리한 믿음에 불과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학적 관측 또한 이론을 수반하는 가설일 뿐이며, 토마스 쿤 Thomas Kuhn 이 지적하는대로 관찰자가 따르고 있는 패러다임 paradigm 이 그가 바라보는 세계와 현실을 만든다. 이는 마치 6근과 6경의 상호작용으로 6촉입처, 6입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이해하는 식(識)의 세계가 곧 우리의 현실 세계임을 말하는 붓다의 가르침과 같다.

 

 

선포(Kerygma, κρυγμα) 혹은 눈높이 맞추기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붓다가 말씀하시는 전생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이해하며,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번뇌를 씻어냄을 표현하는 '삼명'은 수행자들과의 대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주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나누는 대화에서 등장한다. 이는 고대의 논리와 명제를 다루는 관습을 이해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가져오면 굉장히 오해하기 쉬운 내용들이다.

 

하물며 실험과 관측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도 이러한 대화의 방법론을 구분할 필요가 자주 있다. '논리의 힘'을 맹신할 적에는 나 또한 9차제정이라는 체계가 있는데 뭣땀시 6신통 같은 무협지를 써야 하나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과 대화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필요를 더 실감하게 된다.

 

고대 수메르에서 왕족을 기록할 때는 아버지의 이름을 적지 않는다. 수메르 신들의 이름을 대신 적었다. 아카드에서도 왕족들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들의 이름을 적었다.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조차 자신의 아버지는 '마르둑'이었다. 마르둑은 바빌론의 주신(主神)이다.

 

기록과 관측의 정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는 신화적 서사가 필요할 때가 있다. 신화적 서사란 반드시 신과 같은 존재의 언급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방식에 그 중점이 있다.

 

무소유처(無所有)의 알랄라 칼라마, 비유상비무상(非有常非無常)웃다까 라마뿟따는 물론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또한 굳이 도인이나 철학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이해한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무색계(無色界)를 증득(證得)한 경지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나 붓다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무색계의 증득 또한 그 자체로 수많은 모순요소를 갖기에 이를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고대인들이 신들의 세계, 기하학의 세계를 당위성의 근간으로 삼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관측과 해석, 이성적 수용과 오감에 의한 수용을 신뢰하는 토대주의적 입장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이는 방법과 입장의 차이일 뿐 실상은 오늘날까지도 어떠한 ‘서사’ 즉, 스토리텔링 없이 다수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을 통해 나는 여전히 우리가 신화 속 세계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화적 존재들은 과거 신(神)들과 알 수 없는 것들로부터,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들로 옮겨 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