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기원

무엇이(누가) 윤회(輪廻)하는가?

Photographer Bhang 2021. 12. 13. 22:15

요즘 참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이번 생은 틀렸어”라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삶이 어렵고 힘들다는 의미를 여러 기회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태도라 생각된다. 

 

‘윤회’는 불교와 함께 동아시아로 들어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일종의 상식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의외로 불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러한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윤회’의 유형은 아주 다른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자주 저렇게 선채로 죽는다. 문득 이들에게 배울 것이 있음을 느끼고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 2021.12.13 옆방 벽을 바라보다

 

윤회적 사고방식

우리말 사전에서 ‘윤회설(輪廻說)’을 찾으면 불교의 사상인 육도윤회가 등장한다. 이것은 불교가 기본적으로 윤회를 가르치고자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불교를 기반으로 싹튼 문화들이 가진 서사적 기술(記述)에 근거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원시적인 윤회에 대한 생각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들이 달에 간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보름에 달이 커다랄 때에는 많은 영혼들이 달에 머물지만 점점 작아지면 영혼들은 비가 되어 땅에 내린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내린 비는 땅에 양분이 되고 곡식을 내어 그것을 먹은 ‘남자’의 정액을 통해 다시 사람이 된다고 본 것이다. 기상 현상을 남성의 사정에, 땅을 여성의 자궁에 비교하며 일관된 서사를 갖는다. 

 

이것은 후대 우파니샤드와 같은 후기 베다 문학과 더불어 정교화를 더해간다. 윤회라는 것은 불교 혹은 인도의 특정한 문화로 한정하기 보다는 어떠한 거대한 문명의 줄기와 맞닿은 광범위한 문명에서 통용되는 사고방식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순환하는 우주를 주로 생각했던 것은 아리안 유목민들에게서 보편적인 생각이었고, 정착 생활과 더불어 이것이 정교화를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근거가 있는 것이 될 듯 하다.

 

기본적으로 사후 세계의 사고 방식이라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거부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는 다른 글에서 스탠리 메디컬 리서치 연구소 Stanley Medical Research Institute 의 부소장인 정신의학박사 E. 풀러 토리 E. Fuller Torrey 가 뇌의 사용과 발달과정을 역사적으로 짚어보며 뇌발달과 신(神) 관념 발전의 역사를 짚어오는 과정 중 <디가 니까야> 속 ‘대념처경’의 한 부분과 연결할 수 있는 측면이 흥미로웠다고 적은 적이 있다. 훗날 시신관찰(屍身觀察) 즉, ‘9상관(九相觀)’이라는 불리우는 관찰과 이해다: https://bhangyoungmoon.tistory.com/entry/시신관찰屍身觀察-현생-인류의-문명을-낳은-아주-오래된-명상

 

시신관찰(屍身觀察) - 현생 인류의 문명을 낳은 아주 오래된 명상

불상이 처음 인도 아대륙에서 시작한 것이든 혹은 오늘날 파키스탄 지역인 간다라 지방에 전해진 그리스 문화인 마케도니아 문화의 산물이든 중요한 것은 아주 초기에는 붓다의 모습을 조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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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많은 수의 과학자들이 인간의 ‘상상력’이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존에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상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일어난다. 하나는 과거로 또 하나는 미래로 일어난다. 사실 ‘기억’이라는 것은 정보의 저장(save)과 불러내기(recall)이 아니라 적절한 정보를 근거로 과거를 상상하는 행위에 가깝다. 미래는 당연히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과 예측은 모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일어나는 상상인 것이다.

 

상상력은 다양한 학습에 신체를 소모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장을 제공한다. 그리고 상당히 높은 복잡도의 시뮬레이션은 인간 외의 많은 동물들이 실질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상당히 많은 사례를 통해 알려졌다.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는 시뮬레이션과 인간의 고등한 관념들까지의 발전 과정을 그의 저서들을 통해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우주의 창조와 종말을 계속해서 기술하는 서사를 만들어 온 까닭, 오늘날에는 정교한 모델링을 시도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시뮬레이션'에서 그 근간을 찾아 볼 수 있다. 나무에 달린 열매를 가장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길, 사냥감을 가장 적은 소모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상상하기 위해 원인과 결과 그리고 평가를 계속해서 끌어냈던 지능이 창조주와 우주의 근원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지능의 결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행히 '인간의 마음'이라 불리울 수 있는 현상은 자연계의 다른 동물들이나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계산 도출과는 조금 다른 질(quality)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인간이 과거와 미래를 기억하고 예측하는 방식을 토대로 보면 윤회와 그 경험에 대한 의문은 상당부분 풀린다. 또한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초기 불교의 인식이 매우 합리적인 결론을 이미 내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갈애 소멸의 큰 경 Mahātaṇhāsaṅkhaya-sutta

이 경은 <맛지마 니까야>에 있는 경으로, 사띠(Sāti)라 불리우는 비구가 윤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에 이를 붓다가 바로잡아주는 내용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윤회란 오히려 벗어나야 하는 망상에 가깝다. 

 

‘사띠’는 윤회가 “분별하는 마음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이것이 선하고 악한 업의 과보를 받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혼의 윤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붓다의 반응은 이렇다: “어리석은 사람아,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가르쳤다고 그대는 알고 있는가?”(맛지마 니까야, 이중표 역)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각종 인식이란 다양한 조건들이 성립하면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이다. 우리는 각종 인식의 다양한 측면을 우리의 신체적 여건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지어 떠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영겁을 살아가는 어떠한 ‘종자’가 우리 내면에 있고 그것이 우리의 근본을 이룬다고 믿고자 하는 것, 일종의 진정한 나(true-self)를 가지고 있음을 기대하는 것은 인간이 갖는 매우 기본적인 욕구다. 그러나 그러한 특정자를 가리키고 그것이 멸하지 않음을 상상하는 것이 갈애(渴愛, taṇhā)임을 지적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붓다는 윤회를 일종의 망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윤회하는 자로 특정되고 싶은 것이 바로 갈애(渴愛, taṇhā)다

‘시뮬레이션’ 즉, 우주는 이렇게 일어났고 이렇게 멸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이어지는 이 생각의 뿌리는 결국 수 백 만년 전 나무 열매를 따먹기 위해 우리가 했던 무언가 머나먼 느낌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안에 없고, 불변 혹은 불멸하는 무엇인가도 우리 안에 없다. 개별화된 신경계의 연결성이 일으키는 현상적 대상을 존재론적으로 파악에 사로잡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지만 사실 거기에는 ‘있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오래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해주는 것은 맥락적인 측면인 것이지 실질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지금 눈을 껌뻑이며 앉아 있음을 통해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음을 ‘대략’ 알 뿐이다.

 

다양한 비유로 불교적 윤회관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불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나면, 몸은 구성요소대로 자연스럽게 분해될 것이다. 혹은 장례의 방법에 따라 불에 타서 한줌의 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가 남긴 다양한 형태의 흔적들은 흩어진다. 나를 ‘한강’에 비유할 때, 나를 이루던 물이 그대로 한강으로 돌아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바다로 나아가서, 일부는 서해로, 일부는 동해로, 일부는 다양한 지류로, 일부는 도중에 증발하거나 땅으로 흡수된다. 그대로 모여서 서해에서 한강으로부터 유입된 물들만 증발하여 다시 한강 위에 비로 내리는 일이 일어날까? 질량과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이 나의 인격성, 개별성을 유지해 줄 가능성과 연결된다고 믿는다면 말 그대로 논리만을 취해 자신의 ‘갈애’를 위해 모두 이용하는 욕망의 표출에 불과하다. 즉, ‘나’라는 개별성은 완전히 잊혀진 채, 그냥 그 요소들만 남아 우주 안에서 떠돌 것이다. 그리고 되돌아 올 확률은 없다. 이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특히 초기 불교 경전의 윤회관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라는 의식 혹은 인식이 있어 그것이 어떠한 영혼과 같은 그릇을 통해 우주를 멤돌다 다시 몸으로 태어난다는 상상은 죽음을 피하고 생에 집착하는 ‘갈애’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영원한 개별 인식을 가진 존재(sentient)가 된다는 것은 실상 현상태에서 영원한 도태에 빠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의식' 혹은 '종자식'의 윤회를 상정하는 것은 결국 '무한한 기회의 갈구'일 수 밖에 없다. 과보에 따라 태어나는 자신이 달라지더라도 그것은 매번 일시적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무한한 윤회의 사슬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최적의 기회를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느슨한 의미의 만인 구원론이나 다름없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 온 영적 존재가 우리의 근간이라는 상상은 곧 우주의 시작과 끝이 정해진 자신이 숙명론자임을 모르는 숙명론자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과는 관계 없이 ‘닫힌 세계’의 상상의 산물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우리 인식 혹인 생각의 주된 측면이기도 하다. 무량한 세계에서 한정된 것을 취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을 영원 혹은 무한이라는 이해 불가능한 개념으로 바꾸어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이다. 다음에 던질 주사위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수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늘상 품는 것처럼 말이다.

 


위 글은 저의 작품 <순야타 suññatā 空>를 위한 노트입니다:

https://www.bhangyoungmoon.com/sun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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