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이 처음 인도 아대륙에서 시작한 것이든 혹은 오늘날 파키스탄 지역인 간다라 지방에 전해진 그리스 문화인 마케도니아 문화의 산물이든 중요한 것은 아주 초기에는 붓다의 모습을 조각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규칙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논쟁에서 조금 벗어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붓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불상’의 공통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을 하나 짚어보면, 대부분이 어떠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작품을 하고, 구상을 하고 또한 생각에 잠기는 과정은 작가들에게 필수적인 과정이다. 방법은 많이 다르지만, 나는 다소 정적(靜的)인 방법을 취한다. 오랜 시간 앉아서 생각에 잠기는 것인데, 대부분 이것을 ‘명상’이라 부르는 것 같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부르고 있지 않을 뿐이다.
실상 붓다는 어떤 비법처럼 몰래 전수하거나 혹은 감추거나 했던 것이 없다. 그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실행했던 과정들은 세부적으로 전해진다. 9차제정(7식주 2처, 8해탈)과 같은 체계나 디가 니꺄아(Dīgha Nikāya)에 등장하는 ‘대념처경’이 한 예다. 여기에는 호흡에서부터 대상까지 아주 세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앉는 방법인 빠르양카(빨랑카)를 시다사나(‘달인좌’로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로 볼 것이냐 혹은 길상좌, 항마좌 같은 가부좌로 볼 것이냐도 어원 해석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바로, 그러한 도상, 어원, 역사적 맥락에서의 해석 차이가 있을 뿐, 붓다 자신은 사람들이 묻는 것들에 대해 대답했고, 어떤 것들을 비급처럼 전하거나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나는 스탠리 메디컬 리서치 연구소 Stanley Medical Research Institute 의 부소장인 정신의학박사 E. 풀러 토리 E. Fuller Torrey 가 뇌의 사용과 발달과정을 역사적으로 짚어보며 뇌발달과 신(神) 관념 발전의 역사를 짚어오는 과정 중 <디가 니까야> 속 ‘대념처경’의 한 부분과 아주 세밀하게 연결되는 내용이 재미있어 간단하 노트해본다.
훗날 시신관찰(屍身觀察) 즉, ‘9상관(九相觀)’이라는 불리우는 관찰과 이해다.
이는 어찌보면 현생 인류의 가장 오래된 명상의 뿌리이기도 하다.
인류의 많은 언어들은 인간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것은 어찌보면 죽음에 대한 부정의 입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물론 인류 사회의 대부분은 죽음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부정해왔다.
하나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영혼의 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반대로 유물론적 관점으로 천착(穿鑿)해 들어가는 경우, 생명의 의미를 가볍게 여기고 그저 물질적 현상의 불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한쪽은 종교적이고 때로는 미신적이라 여길 수 있고, 한쪽은 객관적이고 또한 과학적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양측 모두 실상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단지 ‘죽음을 부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현대사회는 죽음이라는 실상으로부터 매우 거리가 멀어진 상황이다.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하지만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 안에서는 그다지 경험할 일이 없다. 실상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식량 즉 생물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수확이나 도살로부터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고 생물의 죽음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식량’ 혹은 ‘음식’이라는 관점만을 도출하는데 몰입한다. 다른 생물의 일부, 다른 생물의 살점과 내장, 동식물의 각 부위를 놓고 제식을 여는 기괴한 의식처럼 매일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한다.
매체를 통해 접하는 불합리한 타자의 죽음에 공감하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기괴한 의식을 거행하는, 말 그대로 균형이 무너진 삶에 젖어있는 것이기도 하다.
E. 풀러 토리는 호미닌이 600만년 동안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또한 이제 그것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풀어내기 시작했음에 주목한다. 다른 생물의 죽음이란 지능이 발달한 생물에게는 ‘익숙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현생 호모사피엔스를 제외한 다른 어떤 동물도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은 흥미로운데, 이는 자전적 기억의 발달이 그러한 이해의 필수 요건임을 시사한다 - 침팬지에게서도 그들이 죽음을 이해한다는 신호는 찾아볼 수 없다.”(E. Fuller Torrey)
“오늘날과 달리 10만 년 전 이전까지는 시신의 산헐적인 매장조차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호미닌들은 다양한 부패 단계에 놓인 시체를 목격했다.” - E. Fuller Torrey
E. 풀러 토리는 이후 자연상태에 놓여있는 야생 곡창지대를 접하고 ‘정착화’를 시도하며 문화의 누적이 다양한 방향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시작된 것은 ‘조상숭배’라는 관점에 주목한다. 불멸하는 인간의 본질을 영혼으로 상정하는 문명이든, 역사의 심판과 현현하는 세계 본질로 생각하는 문명이든 동일한 것은 ‘조상숭배’ 혹은 그 관계 속에서 수많은 정당성들을 일으켰으며, 그러한 흔적은 오늘날까지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미신적 흔적으로 남아있다. 다수의 고고학자들이 괴베클리테페, 할란체미, 네발리초리, 차와뉘 같은 고문명 유적의 조각과 흔적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초월적 표현'들은 그들이 집안에 백골을 두고 생활한 것처럼 조상들에 대한 무정형적 표현이었을 것으로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수행승은 묘지에 던져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푸르게 멍들고 고름이 흘러나오는 시체를 보듯, 이 몸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이 몸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이와 같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교하여 관찰한다." - <디가 니까야>, Mahasatipaṭṭhāna Sutta(大念處經) 中
9상관(九相觀)은 <디가 니까야>에 등장하는 유명한 내용이다. 이는 시신의 부패 단계에 따라 세부적으로 분할된 관찰 수행에 관한 설명이다. 죽음과 시신의 부패를 눈으로 관찰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수행을 통해 나 또한, 나의 몸 또한 그러할 것임을 이해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던 것이다.
이는 현생 호모사피엔스의 다양한 문명 기반과 사실상 일치하는 부분이다. 타자의 죽음에 나를 이입(移入)하고 그러한 관찰과 몰입 속에서 얻어지는 통찰이다. E. 풀러 토리는 ‘자전적 기억 능력’을 이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 보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타자에 대한 공감과‘나를 이루는 양태’가 변화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미래 예측이 가능할 정도의 지능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개념과 사실의 분리가 가능해진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을 상상하게 만든 강력한 원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와 연결해 볼 때, 나 자신에 관한 이해 또한 고대 인도철학에서 흔히 전변(轉變)과 적취(積聚)로 이해되던 태도로 양극화 될 수 있다. 삶과 분리된 초월세계를 추구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을 그저 물질적 조합의 결과로만 보는 태도 모두가 실상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살고, 죽는다는 사실을 깊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자칫 균형을 잃고 영적이거나 유물론적인 관점으로 치우치게 된다는 위험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러한 위험을 이겨내고 균형을 발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매우 가치있고 또한 깊이 있기에 오늘도 이에 대한 고민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삼아본다.
우리 주변에 알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탈출구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한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항상 가지라는 메시지다. 갖지 못하는 것을 조건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과 만족이란 잘못 선택된 욕망이다.
무한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우주가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고,
영원함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영원한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앎은 논리적 이해가 아니라 반성과 수용에서 나온다.
위 글은 저의 작품 <순야타 suññatā 空>를 위한 노트입니다:
https://www.bhangyoungmoon.com/sun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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