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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제정(九次第定) 속 무색계 명상과 우파니샤드

생각의 기원

by Photographer Bhang 2021. 11. 2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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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차제정(九次第定) 속에 등장하는 무색계 명상과 베다의 내용을 바탕으로 당대 언급되는 인물들인 붓다, 알랄라 깔라마, 웃다까 라마뿟따의 실존 여부와 그 근거 등을 최초로 연구한 것으로 평가되는 알렉산더 윈(Alexsander Wynne)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감도 잡히지 않는’ 무색계 명상의 문제를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브라흐만 수정주의(修定主義)의 형성과 그 ‘목적’을 알지 못하면 이 무색계 명상의 세계는 그냥 막연하게 유추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반대로 출처를 이해하고 나면 막연함이 다소 해결된다.

인도 아대륙 정착 후에 형성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문화’의 인상은 북부 초원에서 남하한 것으로 알려진 ‘아리안’들의 문화와 인더스 문명을 세운 선정착민들의 문화의 융화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리안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전차’조차도 그림이나 글로 남긴 것이 없어 동시대 다른 문명들을 통해 유추할 수 밖에 없는데, 인도 아대륙에서는 다양한 조각과 도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익숙한 신성(神性, divinity)을 표현하는 주된 도상(icon)들인 좌법(坐法)들은 인더스 문명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에서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물결이 잠잠하고 수면이 고요하지 않다면 그 수면에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 비칠 수 없다

 

삼매(三昧, Samādhi)

삼매라는 용어는 다양한 맥락을 통해서 이해할 필요 또한 있다.
산스크리트어 어원과 용례를 통해 보면, 삼매(三昧, Samādhi)

  • ‘균형, 최초, 기원’과 같은 어원을 통해 ‘온전한 균형 상태’라는 의미를 도출할 수 있고,
  • ‘함께, 얻다, 모으다’ 등의 어원 맥락에서 보면 ‘온전함을 얻는다’는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 또한 ‘일체화 된’, ‘지성’, ‘완성’과 같은 의미의 도출이 가능하여

이러한 맥락들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언어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점은 이것이 단순히 어떤 초월적인 명상의 상태 혹은 집중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논증이나 논리학을 아우르는 표현이라는 점이다. 불교가 등장할 무렵 인도에는 고대 그리스의 학파들이나 중국의 백가제자(諸子百家)의 등장처럼 수많은 학파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삼매’의 정의와 그 이해를 조금 더 폭넓게 가질 필요가 있다.

불교의 명상이 기본적으로 사성제, 팔정도를 바탕에 두고 방법론적으로는 ‘사념처’를 갖는 것처럼 베다에서 비롯된 초월 명상의 경우에도 그 근간에 <베다>의 철학인 ‘브라흐만과의 합일’이라는 틀을 바탕에 두게 된다. <베다>의 관점은 훗날 일반 명사, 동사로 쓰이던 '요가'를 고유명사화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며 오늘날까지 그 관점을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이어오고 있다.

우주의 근원과 합일을 목표로 삼다

내부를 인식하는 자가 아니며, 외부를 인식하는 자도 아니고, 둘 다를 인식하는 자도 아니며, 인식의 덩어리도 아니고, 인식하는 자도 아니며, 인식하지 않는 자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며, 사용할 수 없는 것이고, 잡을 수 없는 것이며, 징표가 없는 것이고,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지시될 수 없는 것이고, 하나의 我로 인식되는 것이 그의 본질인 것이며, 창조가 멈춘 것이고, 평온한 것이며, 상서로운 것이며, 둘이 아닌 것이 네 번째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我다. 그것이 확연히 알아야 할 것이다.

- <만두끄야 우파니샤드 Māṇḍūkya Upaniṣad>, 임근동 번역

nāntaḥprajñam 의 경우 “내부를 인식하는 자”라는 인칭적 번역을 하는 경우가 있고, “내부를 인식하는 지혜”라는 번역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식하는 자도 아니며, 인식하지 않는 자도 아니다 na prajñaṃ nāprajñam”라는 표현인데, “확연히 알아야 할 것” 즉, 알아야 할 ‘아뜨만 我, ātman’을 기술한다. 즉, 브라흐만 수정주의적 입장에서 ‘합일해야 할’ 목표인 브라흐만에 관한 표현인 것이다. 이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주요한 우파니샤드들의 설명과 일치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 Bṛhadāraṇyaka Upaniṣad>와 같은 오래되고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우파니샤드 등에서도 유사한 설명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식의 상태와 관련하여 죽을 땐 의식의 작용이 없어진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미혹이나 혼침의 상태가 아님을 주장한다. 문헌의 맥락을 통해서 볼 때 브라흐만 수정주의는 문제가 될 만한 요소가 하나 보인다. 즉, 우리의 경험되는 세계(empirical world)에 대한 상당한 부정이 내포되며, 이는 상당부분 어족상 동일한 문명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의 주류를 이룬 파르메니데스의 관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훗날 조금 더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다소 극단적인 요소들은 많이 사라지지만, 붓다의 시대에 붓다가 바라본 <우파니샤드>의 관점은 우선 살아있는 동안 삶 속에서의 해탈이라는 요소가 너무나 희미하고, 논리적, 언어적 모순이 상당히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알랄라 깔라마나 웃따까 라마뿟따와 같은 무색계 명상의 대가들의 세계가 무언가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 사실상 이 글을 적기 위해 가장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던 - 알렉산더 윈(Alexander Wynne)의 연구는 이러한 문헌적 일치가 베다 뿐만 아니라 숫따니빠따와 니까야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 원전 자료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니까야에 언급되고 있는 명상법과 그 대가들의 거론이 사실에 입각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베다에서 드러나는 아리안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인식되는 이 우주 이전에는 ‘비존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주 이전의 상태를 비존재, 그리고 존재가 태어나면서 우주의 시작을 기술하는 세분화된 개념이 등장한다. 브라흐만의 나타남이 모든 존재함의 시작이라면 그 이전에는 비존재가 있던 상태다.

이러한 베다를 집대성한 아리안들의 사고방식이 무색계 명상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심상(image)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무소유처(akiñcaññayatana)는 우리말 빠알리어 성전협회의 번역을 따르면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으며, 비상비비상처(혹은 비유상비무상처 非有想非無想處, nevasaññanāsaññāyatana)는 “존재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님” 혹은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제식에서 명상으로

고대 인도 아리안 문화의 이해는 ‘전쟁’ 그리고 ‘제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들 고대 아리안 문화의 뿌리가 되는 ‘신타시타 문화’에서는 <리그베다>의 제식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의 희생제사는 ‘말’을 잡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는 생활공간에서와 장례, 제식 공간에서 등장하는 동물의 뼈 함량을 통해 연구되었으며, 고고학자 데이비드 앤서니(David Anthony)에 의하면 육류 식단은 소, 양과 염소, 말의 순서로 빈도를 볼 수 있지만, 제식에서는 말, 양과 염소, 소의 순서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장례가 치루어지는 곳에서는 말뼈의 빈도가 3배 가량 올라간다는 점을 통해 확인된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힌두문화와 다소 차이를 보여주는데, 소를 신성시하여 건드리지 않으려 하는 힌두교의 문화를 생각하면 원래 북방 아리안들은 소고기를 즐겨 먹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즉, 식단을 위한 ‘가축’이라는 개념에서의 ‘소’는 훗날 어떠한 계기에 의해서 크게 바뀐 것이다. 나는 이들이 인도 아대륙에 정착하면서 농경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변화라는 연구가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말의 희생제’와 관련하여 <우파니샤드>가 시대적으로 베다의 막바지에 해당한다는 점, 그런 가운데에 계속해서 언급하며 그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소위 마제(馬祭, Horse Sacrifice)가 아리안 정착 후에도 계속 되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불교를 통해 이해하고 있는 수많은 용어들은 바로 이들 북방 아리안들의 ‘제식’ 용어들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실상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그 의미가 많이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이 몇 세대만 지나면 크게 변하는 것이어서, 이들이 절대적인 제식 중심 문화에서 정착과 수행 문화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그 단어들의 의미가 그에 발맞추어 변화했다고 한다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브라흐만 또한 원래는 제식을 위한 '언어들'을 현현시켜주는 어떠한 과정과 근원에 대한 통칭에서 우주 현현의 근본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임을 이해한다면, 제식을 통해 우주의 실상을 일으킨다고 믿었던 이들이 수련을 통해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도모한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위 글은 저의 작품 <순야타 suññatā 空>를 위한 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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