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글에서 인용한 알렉산더 윈 Alexsander Wynne 의 연구는 불교의 태동 당시 출가 수행자들 가운데에는 ‘무색계 명상’을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것은 당시 브라만교적 전통에 근거한 것이었고, 그러한 경지의 개척이 목적하는 바의 뿌리는 사후 브라흐만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는 초창기 요가 수행자들의 목표와 관계가 있음을 문헌학적으로 제시해준다. 이러한 명상 수행과 일정한 수준의 성취가 ‘업 Karma’을 극복한다는 사상은 <문다까 우파니샤드>(Muṇḍaka Upaniṣad)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베다 계통의 문헌들에서는 무색계 명상을 뒷받침하는 많은 게송들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적 전통에서는 소위 말하는 4대(四大)와 허공 그리고 의식을 향해 가는 수행의 과정은 무색계 증득을 거쳐, 소위 천지창조가 미현현의 절대자의 자기인식에서 비롯되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러한 창조과정을 역행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오늘날 요가의 뿌리 또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빠딴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Yogas chitta vritti nirodha”라는 구절은 곧 마음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것, 다시 말해 마음의 활동을 제거하는 것을 요가라 정의한다.
무소유처(akiñcaññayatana)는 우리말 빠알리어 성전협회의 번역을 따르면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으며, 비상비비상처(혹은 비유상비무상처 非有想非無想處)는 “존재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님” 혹은 “지각하는 것도 없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없는 세계의 성취”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혹은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어떠한 무아의 몰입 같은 상태는 분명 굉장히 깊이있고 유용한 인식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우파니샤드>에서 처럼 “너희는 我를 ॐ이라고 이렇게 집중하라”는 말은 오움(ॐ)의 소리는 그러한 명상의 경험과 체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깊은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보면 붓다는 이러한 수행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길로 해탈을 이룬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브라만교의 명상 전통과 붓다가 추구한 것은 무엇이 크게 다를까?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밀린다 팡하>와 같은 대화록에서 밀린다 왕과 고승 나가세나의 대화가 경전 전통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에 아주 적절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붓다의 명상은 물샐틈 없는 알아차림을 바탕에 둔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어떤 무아경의 명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일상의 상태 자체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4대 요소와 무색계를 지나는 명상 가운데에서도 “모든 것을 인식하지 않지만 여전히 인지하고 있다 but I was still percipient”(앙굿따라 니까야)는 표현은 비유상비무상과 같은 듯 하나 매우 다른 것이다.
붓다의 태도와 관점은 과학철학에서 선택한 “존중의 원리(principle of respect)”(장하석)와도 유사한 면이 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오감과 의식을 '空'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앎에 이를 수 없음 또한 가르친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몸을 앵커(닻, anchor)로 삼아 마음을 날뛰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적 측면도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의 감각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감각이 정보를 수용하고 의식(consciousness)이 무엇인가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믿을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토대가 잘 다져진 믿음의 토대는 토대가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At the foundation of well-founded belief lies belief that is not founded)”(장하석, <Inventing Temperature>에서 인용)는 주장은 무한퇴행(regressus ad infinitum)에 빠지고, 중단없는 소급에 빠진다. 장하석 교수의 주장처럼 우리가 감각을 우리 앎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정확하거나,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것들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가 오온의 공(空)함을 이해하는 동시에 또한 그것이 사람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양상임을 이해하고 그것들에 대한 바른 이해와 존중을 기반으로 앎에 이르도록 만든다는 관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지식이나 정보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여건임을 인식하고 자각할 때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것들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무한에의 접속이나 있지도 없지도 않은 것에 대한 감각이 아닌 실존적 한계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존중이 우리 자신에 대한 더 명확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자신의 몸을 통해 앎에 이를 수 있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무색계 명상의 문제는 미현현의 현현 같은 문제 그리고 브라흐만과 아뜨만과 같은 대상들의 존재론적 당위성 문제가 걸릴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미 한계를 갖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믿음’의 문제에 빠지는 것이다. 즉, 어떠한 경지를 개척한다는 목표의식과 더불어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명상의 실질적인 성취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상의 경험과 그 체험을 바탕으로 오움(ॐ)의 소리가 갖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인가?
존재론적 당위성의 문제는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소모적인 논쟁에 빠지도록 만들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베다를 만든 북방 아리안들은 찬가를 지어내는 리시들을 세워두고 현현되는 문장들의 당위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머리를 때려 죽였다. 그렇게 살아남아 누적된 내용들이 베다의 찬가들로 전승되었고, 훗날 그들이 인도 북부의 주류 세력으로 정착했을 때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차별하는 계급제도의 도입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해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대상의 존재론적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한 주장은 사람에게 격렬한 감정과 자기 정당화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는 매우 소모적이며, 지성을 가진 인간이 받은 저주와도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토록 신비하다는 ‘브라흐만’의 실체 무엇이었을까?
21세기 인류가 신비적 체험에 심취하는 까닭은 실상 '인지부조화 해결'에 대한 '거부감'을 그대로 따라갈 뿐이라는 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것을 외면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믿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의 입에 맞는 것만을 집어 먹다보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이는 인도아리안들의 문명 또한 마찬가지다. 현상계에서 뻔한 결론이 실상 적절한 해답의 도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고 이러한 것들을 해결해 줄 실마리가 있다고 믿는 방향에서 다른 문명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려 방안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편하게 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브라흐만(Brahman, ब्रह्म)은 단수명사 Brahma에서 왔다. 이는 “확립한다”는 의미를 어원으로 가지며, 산스크리트어 이전의 표현은 대부분 “기본적인 원리”라는 의미를 갖는 표현이었다. 네덜란드의 인도학자 얀 곤다(Jan Gonda)는 기본적으로는 말을, 싯구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였던 이 표현과 정확하게 대응할 만한 서유럽 언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고대 인도에서 아주 복잡하게 변화하고 확장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고대근동인들에게는 ‘초자연적’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현상의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은 신들의 활동과 의지였으며, 대상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는 어떠한 ‘본질’의 이해가 아닌 그것의 용도와 목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신들의 세계와 현상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는 곧 하늘, 땅, 바다, 강의 실체는 신이라는 점을 의미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강력한 서사를 일궈낸 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구약성경이었고, 신과 세계는 이분화 되어 파악되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성경의 관점은 인근 문명들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라는 점에 매우 급진적이다. 하늘, 땅, 바다, 강과 같은 대상들, 강력한 짐승의 형상들처럼 경험되는 대상들의 신격화를 거부하고, 신에게는 언약, 전능, 자비와 같은 인격만 남겨진다는 점 또한 그렇다. 고대 근동에 살던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언어'에 집중한 인도-아리안들의 전통에 있어서 언어를 일으키는 '브라흐만'의 신격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상 그들의 언어에서는 '메타 언어(meta 言語)'적인 접근이 자주 보인다. 언어는 신에게 바쳐지는 공물이었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었다. 그리고 제식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와 행동들 하나하나가 우주의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제식의 과정에서 하는 행위들을 가리키던 '카르마 karma'는 훗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업설 業說'의 어원을 제공했다.
문화의 특징과 언어의 특징은 시간이 흐르고 문명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그 특유의 경향을 갖는다. 네트워크를 자세히 보면 개별자들의 이합집산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조망해보면 하나의 대상처럼 보인다. 먼 옛날 인류가 자신의 힘을 능가하는 대상을 신으로 여기고, 고대 근동인들이 세상을 신이 부여하는 목적성을 토대로 바라보았다면 인도-아리안들은 '말'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를 우주의 근본이며 신의 실체로 여긴 것이다.
현상과 본질을 꽤나 근본적으로 분리하는 시도는 사실 인도-유럽어족 문화와 문명의 특성이다. 이집트의 철학이나 공학은 그리스에서 현상의 본질을 기술하는 학문으로 발전해나갔고, 비슷한 시기, 불교가 태동할 무렵의 인도에서는 정합적 인식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그에 대응하는 실재가 다른 곳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 실재론의 기본적인 태도였다. 실상 브라흐만이라는 것은 시인의 영감이 현현되는 프로세스 ‘정도’로만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순간 미현현의 우주의 근본적 실체를 설명하려는 말로 변해갔고, 이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회의적으로(skeptical) 바라본다면 어느 것 하나 언어와 개념의 구조적 형태일 뿐 아무런 실질적 정보가 없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인간 지능과 의식이 언어라는 틀을 통한 해석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심상들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폴란드의 인도학자 아스코 파폴라(Asko Papola) 교수는 인드라의 명칭이 원시-우랄어족의 기후의 신으로 천둥과 하늘을 의미하는 *Ilmar/ *Inmar 에서 왔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고대 핀족의 서사시에서 전쟁의 주된 영웅들 가운데 한 명인 일마리넨(Ilmarinen) 역시 천국의 돔 천장과 삼포를 만든 대장장이라고 전해진다. 이처럼 모든 문화 속 신화적 존재들은 서사의 태동과 각 문화간 수용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고대의 지혜와 그들의 찬가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이 필요에 의해 도입된 개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 또한 더불어 중요하다. 개념에 대한 잘못된 존재론적 이해와 수용은 자칫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자신의 감각을 선행 표준으로 삼는 것은 시시하고 대단할 것이 하나 없어 보여도, 그것은 다른 어떠한 기준들보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 선행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계성에 대한 깊은 이해야 말로 우리에게 정말 알 것을 알 도록 만드는 길이라 생각된다.
인류의 과학기술과 문명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매우 성공적인 이론을 확립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에 기본을 두고 있는 토대론적 기반의 모델링이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대상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흔들리고 흔한 우리 자신이 목적 없이 떠돌아도 이러한 우리 자신을 이루는 여건은 이 세상 모든 것임을 먼저 알게 된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심오한 진리는 결국 그러한 마음의 확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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