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

아수라(阿修羅, Asura) - 구약성경, 에스라, 느헤미야, 불경(니까야), 인도, 한반도를 연결하는 희미하고 신비한 끈

Photographer Bhang 2021. 4. 4. 23:56

기원전 850년경,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가 제국의 형태를 갖출 때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 ‘파사’라는 이름이다(바사). 구약성경의 중간 지점을 보면 바로 이 ‘아리안’들의 역사 일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리우스 1세의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신앙심은 우리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화와도 접점이 생긴다. 이런 연결점들은 매우 흥미롭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 에스라 1:1

구약성경 에스라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신바빌론 제국의 부상과 함께 멸망해 포로로 끌려왔다. 이것은 고대 제국들의 방식 중 하나로, 국가에 필요한 인력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정착과 농경 그리고 국가의 성립은 인구증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노동력과 군사력을 보충하는 국력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신바빌론은 키루스 2세의 손에 멸망한다. 바로 ‘바사 왕 고레스’다.

키루스 2세는 후계자를 제대로 지명하지 못해 가우타마라는 인물이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로 잠시 등장하지만 결국 다리우스 1세의 손에 죽는다. 키루스 2세와 다리우스 1세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민족, 다언어, 다종교적 특징을 잘 이해하고 다스렸던 인물들로 통한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하다

구약성경 <에스라> 2장에서 고레스 즉, 키루스 2세가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바로 등장한다. 사실 이 호칭은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다. 다른 글에도 적어두었지만, 이것은 바빌로니아 즉, 메소포타미아 제국들의 전통이다: bhangyoungmoon.tistory.com/entry/천지창조-내러티브와-테드-창-Ted-Chiang-의-소설-Tower-of-Babylon

 

천지창조 내러티브와 테드 창 Ted Chiang 의 소설 Tower of Babylon

테드 창(Ted Chiang, 姜峯楠)은 잘 알려진 SF 작가로, 영화 의 원작 소설 의 저자이기도 하다. 2021년 3월 30일, 경기도 모처에서 5시간 가량 긴 이야기를 나누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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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와 관련해 구약성경이 ‘아베스타’ 즉,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신교적 주변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키우는 것이 더 주요한 방향성이다. 구약성경에는 분명 다신교적 환경에서 절대적 유일신관 유지를 위해 아베스타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그보다는 가나안 즉, 우가릿 문화와의 직접적인 교류의 흔적이 훨씬 더 많이 등장한다.

구약성경의 일신교 관점은 메소포타미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의 다신교적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을 극적으로 뒤엎는 내러티브로 시작한다. 바로 <창세기>다.  창세기가 이집트의 <헤르모폴리스>, 아카드의 <에누마 엘리쉬>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계에서도 많이 연구되고 있다. 주변 제국들의 절대신들을 즉, ‘하늘’을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것이 창세기 1장이 갖는 매우 중요한 의미다. 문제는 <에스라> 같은 문서에 오면 창세기에서 애써 그려낸 ‘단순한 피조물’이라는 하늘이 하나님이 계시는 공간으로 탈바꿈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레스’의 입에서 시작되지만 말이다.

키루스 1세는 엘람 문화를, 캄비세스 1세는 바빌론 문화를 중심으로 통치 이념을 삼았다. 바빌론 문화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면 당연히 ‘마르둑 Marduk’을 국가의 주신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는 키루스 2세의 키루스 헌장(Manshūre Kūrosh)에서도 발견된다. 키루스 헌장은 키루스 2세의 종교적 관용과 다민족 문화에 대한 포용을 정책 방향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까지도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이 언급된다.

성경에서는 키루스 2세(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허용한 사건을 매우 극적으로 크게 다루지만, 키루스 헌장에는 구약성경 <에스라>의 기록 같은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에스라>가 역사적 날조라기보다는 당시 이스라엘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약소국’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있다. 

문서의 보존과 번역이 가장 잘 이루어진 구약성경의 영향력으로 인해 최근까지 이스라엘의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정확히 몰랐던 것 뿐이다. 이스라엘은 레반트 교통요충지에 있었던 조그만 나라로 당시 제국들의 주요 문서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약소국이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러한 약소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주변 국가들의 문물을 대거 수용했고, 때문에 구약성경 안에는 우가릿 신화들이 대거 녹아들어 있다. 

또한 국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구약성경의 주요한 부분들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독일의 신학자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를 신명기사가의 단일 저작으로 보는 연구를 내놓았다. 거대 제국들의 전장에 위치한 약소국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다지는 각오를 품고 한자한자 적어 내려간 처절한 신앙의 기록인 것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저항하지 않고 피해 다니는 기록은 다윗의 개인사를 넘어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리우스 1세와 아케메네스 제국의 영향력

역사적으로 기원전 850년경에는 ‘파사’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유목민이었던 사람들이 세운 국가가 등장한다. 구약성경 안에도 이들 유목민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호림, 메데인들을 비롯, 바사(페르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주하는 ‘아리안들’이었다. 아리안은 ‘고귀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어원적으로 풀어보면 ‘손님을 환대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즉, 기원전 850년경은 오늘날의 이란 지역 즉, 아케메네스 사람들과 인도로 넘어간 사람들 사이에서도 문화적 갈라짐이 크게 발생하는 요소들이 많이 등장한다.

문화적 분열을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 하나가 기원전 850~600년 사이에 발생하는 이란조어 Proto-Iranian 속 발음변화 현상이다. H > S 아르케메네스 쪽에서는 영토 동쪽 끝 지역을 'Hindush'라고 불렀다. 이 -sh 로 발음되는 접미사는 아르케메네스 제국에서 지역명을 붙일 때 자주 사용되었다고 본다. 이 말은 인더스 강을 가리키는 중요한 단서인데, 인도로 넘어간 사람들은 동일한 지역을 ’Sindhu'라고 불렀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케메네스 즉, 페르시아를 바라볼 때 유럽인들의 관점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고대근동의 연구 자체가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리 동아시아와의 연관성도 매우 깊은 것이 많다.

 

유목민의 이주 시대에서 종교 전파의 시대로

종교는 국가의 성립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E. 풀러 토리 E. Fuller Torrey 는 (1) 농업혁명과 죽음에 대한 인식 강화, (2) 급속한 인구의 증가와 내세관 정립, (3) 도시 건설과 조상숭배, (4) 위계질서, 권력구조의 등장과 조상간 위계에 관한 계보관념 (5) 왕과 통치기구 등장과 신의 출현 (6) 왕에게 부여된 신권과 신이 세속적 법률에 강제성을 부여한다는 논리가 연관이 있음을 강조한다: bhangyoungmoon.tistory.com/entry/힌두교와-인도-신비주의-결국-돈과-권력이-문제다

 

힌두교와 인도 신비주의 - 결국 돈과 권력의 문제다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연구를 통해서 과거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실들을 밝혀냈다. 1995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의 첫 첩보위성사진 프로젝트인 '코로나 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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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주요한 신관(神觀)의 정립은 국가와 정치제도의 정착과 관계되는 것이다. 실크로드의 바탕이 되는 초원길로 유라시아 유목민들이 아시아 대륙 이곳저곳으로 이주하던 시기에는 그러한 딱딱한 종교적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중국의 본격적인 국가 시대 이후에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국가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던 시점에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를 교류했다. 국가의 경계가 점점 명확해지고, 문화교류는 전략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사람들에게 가장 깊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복을 빌고, 화를 면하는 종교인 것이다.

 

인도의 국가시대와 카스트 제도

아케메네스 제국이 다리우스 1세의 통치로 안정되고 있던 시점에 인도 북부에 정착한 유목민 즉, 인도아리안들의 소규모 국가들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인도아리안들 즉, 유목민 조상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식물이 자라면 그들의 핵심 자산인 가축들이 그것을 먹고 자라는 순환구조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제사의 의식을 통해 계속해서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불’을 다루는 의식과 더불어 제식을 부르는 이름까지 <아베스타>와 <베다>에는 유사한 것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싸마 찬가의 서곡을 노래하는 부제여, 그대가 만일 싸마 찬가의 서곡에 따라 깃든 신을 모르면서 서곡을 노래하면, 그대의 머리는 분명히 떨어질 것이오!” <찬도그야 우파니샤드> (임동근 역)


우파니샤드 같은 책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머리가 떨어진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착기 이전의 인도아리안들 가운데 제사를 집도하는 사제들에게 제사 집도는 목숨이 걸린 문제와 연관이 있었다. 이 말은 과거 제사에 쓰이는 수많은 언어들과 행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인도-유럽어 문화에서 항상 ‘언어’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스에 정착한 이들은 이집트 문물의 영향과 더불어 항진명제적 언어 구조 속에서 기하학과 고등수학을 발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동쪽으로 이주한 인도아리안들의 문화 속에서는 세계를 이루는 본질적이고 근원적 존재에 대한 접근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머리를 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바로 ‘신에게 바치는 언어’가 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던 이들의 문화를 보여준다. 정착시대가 되면 머리를 쳐서 죽이기 보다는 집례자인 사제계급만이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사유화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다. 만일 자격이 없는 자가 경전을 배우는 구전 현장의 소리를 들으면 귀에 쇳물을 붓거나 귀를 찔러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흔적들은 불경에서도 등장한다: 

"여래가 세 번이나 이유있는 질문을 했는데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머리가 일곱 조각 날 것입니다."
그 때에 금강수 야차가 달구어지고 불타오르고 빛을 내뿜는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바라문 학인 암밧타의 머리 위 허공에 나타나 '암밧타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의 머리를 일곱조각 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섰다. 세존 뿐만 아니라 바라문 학인도 그 야차를 보았다."<디가 니까야>, 암밧타의 경 중

 

바라문 즉, 브라만과 붓다의 대화가 등장하는 장면은 이미 정착기 국가 시대에 접어든 인도의 현실을 보여준다. '니까야'에 등장하는 기록들은 붓다 시대가 되면 이미 제사에 쓰이는 언어를 만들어 가는 리시(rishi)들의 경쟁구도적 형태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베다를 만들던 인도아리안들의 전통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그 내용 일부만 남아 신화적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머리가 떨어지는 맥락이 훨씬 본래의 맥락에 가까운 반면, 불경인 '니까야'에서는 머리가 깨지는 장면에 난데없이 금강수 야차(vajirapani yakkho)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금강(vajra)이라는 무기는 또한 우랄어 화자들과 인도아리안 문화가 만나는 시점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들은 붓다가 활동하던 인도 북부 특히, 갠지스강을 건넌 동쪽 땅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이런식으로 따지고 보면 '카스트 제도'라는 관점으로 인도처럼 넓은 문화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보려는 시도 자체가 좀 무리가 있다.

당시 카스트 제도는 단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도 아대륙 북부에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기본적으로 브라만 사제의 권위를 존중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로 갈라지는 경향이 보인다. 이를 ‘지혜의 왕 wisdom king’ 모델이라고 보는데, 이러한 정치세력들이 눈여겨 본 것인 아케메네스 제국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화폐 시스템을 만들었고, 은화와 금화를 이용한 시스템이었다. 당시 중앙 갠지스 지역에서 발견되는 인도 지역 최초의 화폐들인 주화들은 이러한 아케메네스 제국 문물의 영향이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인도의 서북부는 아케메네스를 통한 메소포타미아 문물과 멀리 그리스의 천문학을 수용하는 통로였고, 메소포타미아 문물이 들어오는 통로였다. 오늘날 ‘파키스탄’이 위치한 곳이 바로 이 통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브라만 사제들의 밥 그릇 지키기

카스트 제도가 브라만 사제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정착되는 지역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왕이 신탁을 받는 구조를 도입하게 된다면 브라만 계급은 엄청나게 위협을 받게 된다. 나 또한 최근까지 당시 인도 상황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아수라’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을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다리우스 1세 같은 아케메네스 통치자가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모시고, 인도로 넘어간 인도아리안들은 그에 대한 반발을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 뿐이었다. 당시 이란조어에 등장하는 발음 변화(H > S) 외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어려웠다.

그러나 제프리 새뮤얼 Geoffrey Samuel 의 저서를 통해 당시 중앙 인도-갠지스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브라만 - 반브라만 정치기구들의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이럴 때 브라만 사제계급은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20세기 중반 소위 ‘구루 Guru’들이 횡령이나 성추행 같은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2,5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베다 즉, 제식을 위해 준비된 말인 산스크리트어는 사제 계급이 전유하고 있었다. 경전은 문자기록을 하지 않았고, 초창기 베다는 문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미 전승된 ‘구전 문헌’들이다. 문헌을 통해 연구해보면, 인도아리안들의 강력한 신인 ‘인드라’ 또한 원래 아수라였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수라는 ‘군주’ 같은 의미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신과 인간 즉, 신과 다른 존재의 혼혈로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케메네스의 다리우스가 ‘아후라’ 마즈다의 권위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인 통치자로 세우는 것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앙 인도-갠지스 지역의 브라만들은 ‘아수라’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신빙성있는 결론 도출이 아닐까 싶다.

키루스 2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려보내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리우스 1세는 키루스 2세가 약속한 이스라엘 성전 재건과 관련한 재정적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다리우스가 마르둑이 아닌 아후라 마즈다를 내세운 통치를 편 것은 인도아대륙에 위치한 정치세력들의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아후라 마즈다(Ahura-Mazda)와 ‘지혜의 왕’ 통치 모델이 중앙 갠지스 지역에서 득세할 수 없도록 브라만 사제들은 ‘아수라(Asura … H > S)’를 악신으로 삼는 서사를 심는다.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문물의 창구역할을 했던 인도 아대륙의 북부지역 즉, 오늘날의 파키스탄 지역은 훗날 최초의 불상이 조각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통로들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또한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불교가 전해지는 길이 된다.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에스라, 느헤미야를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먼 옛날 역사적 사실과 이야기들을 통해 이어져 있는 끈이

희미하지만 신비로운 빛을 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