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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테페, 할란체미, 네발리초리, 차와뉘 - 고문명에 대한 환상들

시간 여행

by Photographer Bhang 2021. 5. 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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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문명'이라는 것을 고민할 때, 특히 동아시아 사람들은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역사를, 문화를, 더 거대하게는 문명을 국가와 동일시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 중심에는 아무래도 일찍부터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이라는 관점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열을 올린 식민지 개척과 1, 2차 세계 대전 같은 국가 혹은 민족 중심의 사관 등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인도는 비교적 최근까지 500개가 넘는 토후국으로 이루어진 국가였고, 미국은 중앙정부가 존재하지만 연방제도를 주축으로 하는 자치제도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그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가 1,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국가의 독선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했다. 그러다보니 국가 특히 중앙정부 중심으로 무엇인가를 운영하기 참 어렵다.

 

우리가 <4대 문명 기원설> 같은 것들을 이야기 할 때는 이미 인류의 문명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상태다. 이러한 교과 항목적인 접근은 우선 세월이 흐르면서 같은 민족집단에서도 언어는 크게 변한다는 사실, 같은 지역도 민족 집단이 완전히 교체될 수 있다는 사실, 인류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종(種, species)이라는 점, 그리고 후기 빙하기의 상황 등에 관한 고려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 인간이 기본적으로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는 규모는 200명이 조금 못된다. 때문에 어떠한 공동체가 도시, 국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사람들을 연결할 다양한 장치들이 필요하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인 수메르 학자 노아 크레이머 Samuel Noah Kramer 교수는 '수메르'가 인류 문명, 국가화에 필요한 39가지 요소를 최초로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일찍부터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국가가 있었던 우리 한반도는 사회, 문물, 문명을 전적으로 국가와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으며, 문자와 언어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실상 이것은 다양한 문명으로부터 단절된 우리 역사의 비극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들로 이를테면 고대 유목문명인 아나파셰보, 오손, BMAC 같은 문화들을 전적으로 ‘국가’로 보는 경향이 생기고 심지어는 문명 연합체들을 ‘제국’으로 부르는 경우까지도 생긴다. 

 

오히려 더 오랜 문명들에서는 성벽이나 왕조 혹은 경계 안에서 생활하는 공동체가 있었고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길가메시>의 이야기를 예로 보면, 이야기의 주인공 ‘길가메시’와 그의 친구 ‘엔키두’는 바로 성 안의 사람들과 성 밖의 사람들에 대한 상징성을 갖는다. ‘미지의 세계’ 혹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성 밖의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또 다른 세계다. 오늘날처럼 국가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빈틈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지구상과는 정말 다른 상황이었다. 

 

이러한 정황들을 과거에 알기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탐사와 기술의 문제가 주요했을 것이다. 또한 2차 대전, 냉전 시대 등의 국제 정세 또한 이러한 어려움의 커다란 원인이었다. 국가화를 이룬 대규모 정착 문명이 아니면 조사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여전히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문명들의 이름이나 순서는 일반인들에게 생소하며, 인도 아대륙의 모헨조다로 유적과 그 문명과 관련해 오늘날 인도 문명과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인더스 문명’이라는 단순화로 수많은 오해를 만들어 냈다. ‘정착생활’이라는 구조는 국가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가능하다. 과거를 그려볼 때 중요한 것이 이런 점들이다. 현대사회와 소위 말하는 ‘고대’는 말 그대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러나 자료의 누적, 탐사기술의 발전, 생각의 전환 등 지난 100여년에 걸쳐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변했다. 

 

 

정착 생활의 흔적

인류가 공동생활을 한 것은 굉장히 오래되었다. 공동생활이라는 것 자체가 인류의 지능의 발전과 매우 큰 상관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다.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네안데르탈인들의 뇌 기능이 호모 사피엔스에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음성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유전적 구조 또한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공동체의 규모였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공동체의 규모가 지능의 발달을 부른다.

 

할란 체미나 괴베클리테페에 관한 환상은 흔히 말하는 고문명 환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레반트 지역과 아나톨리아 지역은 일찍부터 정착해서 생활한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유력한 결론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양끝단에는 당시 매우 풍부한 야생의 곡창지대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것의 발견이 농경과 정착을 가능하게 하는 초기 조건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부터 정착지대에 곡물의 양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이상 규모의 공동체가 되면 그리고 그들이 정착하게 되면 정기적인 식량을 조달할 수단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연구는 끊임없이 초창기 정착 공동체보다 수렵채집 공동체의 식량 여건이 훨씬 풍성했음을 보여준다. 정착 초기의 사람들은 영양실조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인간의 난개발이 없다면 야생동물은 굶어서 죽지 않는다. 인간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동안 자신들의 어떠한 여건과 목적의 일치로 한 곳에 정착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정착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직 이주생활의 손쉬움과 풍성함의 기억이 남아있던 사람들은 정착생활의 불리함을 깨닫고 공동체를 떠났을 것이다. 괴베클리테페, 할란체미, 네발리초리, 차와뉘와 같은 유적들은 식량유지와 일부 식물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작물화를 성공시켜 한동안 유지 가능했던 지역들이었을 것이다.

 

카스피해, 흑해 인근의 고문명들에서 출토되는 유골을 조사해보면 당시 사람들이 생선으로 많은 영양분을 공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정착된 국가화를 지향하지 않았으며, 인근의 강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공동체들이 존재했다. 이들의 국가화는 대개 이주 후 기존의 국가들을 빼앗는 전략의 성공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페르시아와 인도다. 이러한 연구들은 최근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국가화 사회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고문명 사회

현대 민주국가에 사는 우리가 어느 날 저녁 편의점에 간식을 사기 위해 슬리퍼를 신고 가는 상황에서 옆집 사람을 만나는 상황에 국가의 개입은 없다. 이 정도의 느낌이 정착생활자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국가와 다른 조직의 개입을 경험한다. 집과 연결되어 있는 상하수도 파이프 라인, 전기가 오가는 전선, 통신시설을 연결해주는 수많은 케이블들은 거대한 조직과 때로는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설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편의점에 걸어가기 전 머리를 가볍게 적시기 위해 다가서서 물을 트는 세면대, 길가에 켜져 있는 가로등,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 편의점 냉장고의 전기 그리고 편의점이라는 프랜차이즈 유통방식 등, 이 모든 것에는 현대국가의 개입이 묻어있다.

 

인류의 초기 정착생활이란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굉장히 먼 이야기다. 완전히 다른 세계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해되지 않는 수많은 관습들이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다. 인간의 지능을 비롯해 모든 것이 공동체 생활로 인해서 생겨난 것들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구조가 바뀌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의 근간이 바뀐다. 인간의 인지능력, 언어능력, 지능과 문화는 물론 가족제도, 성역할 등 우리가 인간의 ‘근본적인 것들’이라 믿었던 모든 것들이 실상은 진화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종(種, species)의 공동, 집단지향성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일찍이 다윈은 심리학과 사회학은 생물학의 분과가 될 것이라 예견한 바 있다.

 

 

국가화의 조건

한 인간이 기본적으로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는 규모는 200명이 조금 못된다. 때문에 어떠한 공동체가 도시, 국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사람들을 연결할 다양한 장치들이 필요하다.

 

국가가 존재하려면 법 체계가 필요하고 이를 이행할 제도와 인력이 필요하다. 공무원 사회가 존재했다는 것은 교육제도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가능하며, 때문에 수메르와 같은 '국가화 한 문명'의 경우 조세제도는 물론 세금감면과 관련된 룰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인 수메르 학자 노아 크레이머 Samuel Noah Kramer 교수는 '수메르'가 인류 문명, 국가화에 필요한 39가지 요소를 최초로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것들을 놓고, 이집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집트가 최초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집트나 수메르나 강을 이용한 그리고 삼각주 지역이 연결되는 지리적 요건을 바탕으로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초기의 농업은 지금처럼 땅을 갈고 관리하는 것보다는 강의 주변에서 물의 잔잔한 범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농업을 의도해 정착을 한 것이 아니라 농업이 가능함을 알면서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은 혁명이 아니다. 정착이 식량 생산에 유리할 수 있다는 측면을 이해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기나긴 과정의 산물이다.

 

땅의 생산력이 약해지는 점, 감염병의 창궐 등은 정착 생활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정착 문명이 사라진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문명들은 어떠한 드라마틱한 단일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가장 유력한 원인들은 높은 인구밀도와 오랜 정착기간에서 비롯된 감염병의 창궐 그리고 반복되는 농사와 부족한 지식으로 인한 토질의 악화 등이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 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농사가 잘 되었으니 그 후에도 잘 될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이 실상은 멸망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땅의 생산력이 약해지면 양질의 식물을 얻을 수 없다. 한정된 공간에서 농사를 반복해야 하는 경우 문명이 오래 갈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때문에 농업과 정착이 일어난 시대에 접어들어도 인류의 대부분은 이주와 정착을 반복하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질병이라던가 굶주림에 시달릴 가능성이 훨씬 적은 방법이었다. 사실상 코로나-19 같은 대규모 감염병의 발생은 오랜 정착생활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많은 문명의 기록들은 성 안의 사람들을 문명으로 성 밖의 사람들을 '야만'으로 취급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선전)을 계속해야 했다. 성벽이라는 것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다는 이유로 세우지만, 실상은 내부의 인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다. 또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빌론 유수’처럼 다른 지역을 정복해 자기네 나라로 수 백, 수 천 km를 이주시키는 일도 발생한다. 오늘날 말하는 ‘인구의 감소’ 문제는 국가화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문제다. 반대로 지구의 생태적 상태를 생각해보면 단일 종임에도 불구하고 지구상 포유류 체질량의 36%를 차지하는 인간의 숫자는 심각할 정도로 많은 상황이다. 즉, '국가'가 국력의 유지를 위해서 늘려야 하는 것이 인구이며, 지구의 생태적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줄여야 하는 것이 인구다.

 

조금 관점을 넓혀서 바라보자. 

수 천 년의 정착 문명의 결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주해오는, 소위 유목민들의 문명이 뒤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은 오히려 훨씬 다양한 문물을 발전시켜 기원전 1천년경에는 고대 근동은 물론 중앙아시아 등의 절대적 강자로 군림한다. 대표적인 예가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문명이다. 

 

우리가 문명사를 접근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가개념’이 맞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일괄적으로 국가개념을 도입하기에 모든 문화에 대해 ‘국가’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바라보려는 경향이 생기고, 그렇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생긴다. 문명사에 대한 이해를 위한 첫 걸음, 그것은 말 그대로 “잔을 비우는 것”이다.

 

 

수메르는 사라졌고, 이집트는 년을 지속했다

이집트는 천혜의 자연 환경으로 방어가 손쉬운 지역이었다.

남쪽에서 오는 적은 어려운 지형을 뚫고 소규모로 올라와야 했기에 방어하기 쉬웠다. 서쪽으로는 거대한 사막지대여서 대규모 공동체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동쪽과 북쪽의 관리가 핵심인데, 해전은 이집트 문명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후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카데쉬 전투에서 히타이트에 승리한 것이 이집트가 이 지역의 패권을 굳건히 하는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국가화는 이 시기 즈음에 가능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은 지형적으로나 여러가지 요소가 달랐다.

최근 이해 가능해진 부분 한 가지는 바로 강의 유속 변화다. 수에즈 운하와 같은 지리적 요건이 이집트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나일강 주변은 녹지다. 그러나 유사한 지리적 조건이었던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끝은 삼각주가 아닌 사막화 되었다.

 

사막화의 원인 중 매우 주요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고대 도시개발 프로젝트다. 이집트 하면 거대한 석조 건축이 떠오르지만 메소포타미아 문명, 특히 수메르나 아카드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것은 실상 목재 사용 빈도가 높았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이집트의 경우에도 석조 건축물이 대규모로 사막 밑이 묻혀 있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반해 일반생활 목적으로 지었을 법한 흔적은 상당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레바논의 백향목 이야기가 등장하고, 솔로몬의 건축에서도 등장한다. 즉, 강의 상류에서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벌목을 진행했던 것이다. 양질의 나무를 수 백 km 운반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바로 강을 이용한 운반이다. 이것은 점차 강 주변의 벌목을 가속화한다. 강 바닥에 쌓이는 토사는 유속을 바꾼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강의 끝에 쌓이게 된다. 이것은 기후 변화와 맞물려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고대 문명 발상지 하나를 사막화 시킨 원인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사람들은 공격할 대상이 필요했고, 이집트의 사람들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지형적으로 이집트는 방어가 쉬웠고, 땅은 비옥했다. ‘이집트’라는 왕조의 출현 훨씬 이전부터 그들은 나일강을 통해 가능했던 농경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점차 거대한 정치기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고, 수많은 협력 활동을 이루었다. 피라미드와 거대한 건축물들의 실상은 여가 활동에 가까운 것이다. 만약 문명이 초토화되고 피카소의 그림 몇 점이 어딘가에서 수 천 년 뒤에 발견되었을 때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의 해부학적 구조를 고민하게 될 것이고, 과거 아주 다른 지적 생명체들이 지배했던 지구상황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예를들어, 21세기 대한민국 문화를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데이터가 무엇일까?

카카오톡 대화, 유튜브 콘텐츠, 인스타그램 등에 올라오는 사진들일 것이다. 유적이나 유물을 놓고 유추하기 시작하면 우리 삶의 실상을 먼 미래에 알기 어렵다. 당시 가장 생생한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스마트폰을 발견했다고 보자. 유리와 금속, 플라스틱, 실리콘 등으로 구성된 복잡한 기계는 식물을 자르기에도 불편하고, 다른 물건을 부수기에는 형편없이 약하다. 대체 이것을 무엇에 썼을까?

 

신호등을 이해하려면 그것과 관련된 사회제도와 그 약속들을 알아야 한다.

신호등을 뜯어서 그 구조를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까?

인간 의식의 발전과정을 자세히 조사해 볼수록 고문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지난 1만년 동안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괴베클리 테페, 할란 체미, 네발리 초리, 차와뉘라는 유적과 생활상은 오늘날 ‘조상숭배’라는 곳으로 그 중점이 모아지고 있다. 자신보다 앞서 죽은 자들을 무정형 혹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 어떠한 형태로 묘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화인류학, 심리학, 고고학 그리고 종교학적 연구들에서 일치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 시기를 바탕으로 28개의 수렵채집 사회를 연구한 결과가 성과를 내기도 했는데,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조상숭배’라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앙의 형태를 보여준다(E. 풀러 토리).

 

괴베클리 테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한쪽 끝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 쪽이다. 그리고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북아프리카의 나일강 유역은 인류가 최초의 정착 농경에서 국가화를 이룬 지역들이다. 이들 지역에서 야생 작물들을 점차 품족 개발과 정착 문명의 기반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관해서는 <총,균,쇠>로 유명한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중국 베이징 대학의 정예푸(鄭也夫) 교수를 비롯, 수많은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부분이다.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문명 재창조나 외계문명 개입설과 연결 짓고 싶어하는가?

그것은 항상 빠른 결론을 도출하고 싶기 때문이다.

 

발굴지들에 따라 발굴지 보호를 위한 설비들이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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