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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속 시간여행(Time Travel)

시간 여행

by Photographer Bhang 2022. 2. 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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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시간여행이 등장하는 문학으로 H. G. Wells 의 <The Time Machine>을 떠올리지만,

내가 볼 때 시간여행의 개념이 훨씬 구체적이고 현대과학에 걸맞게 등장하는 묘사는

사실 Jonathan Swift의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한다.

 

"He has been eight years upon a project for
extracting sunbeams out of cucumbers,
which were to be put in phials hermetically sealed,
and let out to warm the air in raw inclement summers." 

(from "Gulliver's Travels (Xist Classics)" by Jonathan Swift)

 

오이에서 햇빛을 꺼내보자

스위프트의 대표작 <걸리버 여행기>에는 재미있는 실험이 나온다.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해 사용해보겠다는 실험을 해오고 있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손쉽게 ‘시간’이라는 축이 더해진다는 수학적 모델을 이야기하는데에 거부감이 없는데 자세히 보면 x, y, z 축도 제대로 움직일 방법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실상 x, y, z 축은 수학적 모델이지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에서 성립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공간과 운동을 기술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의 ‘방향성’ 즉, 우리가 흔히 ‘시간이 흐른다’라고 기술하는 어떠한 현상은 엔트로피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다층적인 구조물이며 복잡한 요소들의 관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Time is like an engine of your scooter, you can take away one piece,
carburetor, you can take away piston, take away this, take away that
and what is that remains nothing at all." - Carlo Rovelli  

 

인간이 많은 경우에 하는 꽤나 일관된 실수가 이것이다. ‘모델’과 ‘실상’의 혼동이다. 다시 말해, 어떠한 대상을 명명하고 개념화하기 위해서 선택된 방법들을 사실과 혼동하는 것이다. 언어, 개념에는 지표성(index)이 있고 그것은 사실을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지속적으로 고찰해 온 것이 20세기 유럽 철학의 큰 줄기였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사실들에 비춰볼 때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이에서 햇빛을 꺼내는 것은 실상 카를로 로벨리와 같은 물리학자들이 알려주는 '시간의 방향성'과 직결되는 문제에 관한 언급이다. 엔트로피의 방향과 에너지의 발생 그리고 그것은 시간에 방향성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은 H.G. Wells가 그의 소설 <타임머신 Time Machine> (타임머신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의 소설 제목에서 왔다고 한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상하좌우의 이동이 가능하다면 시간이라는 선을 따라 여행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라는 것이다.

 

로벨리는 시간을 '패키지 package'라고 표현한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통해 발생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따져보기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혼란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이미 있는가/ 없는가로 질문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광속에 근접한 속도로 여행한다는 것을 통해 시간의 상대적 흐름을 극대화하고 결과적으로 상대의 미래에서 기다리는 것과 같은 시간여행의 효과를 내는 것은 말 그대로 그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여행이라면 우리가 흔히 해외 여행을 갈 때 항공권을 왕복으로 끊는 것처럼 갈 수 있으면 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은 실질적으로 시간의 방향성을 무시하고 여행하는 것은 오이에 들어간 만큼의 햇빛을 태양으로 되돌리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를 요구받기 때문이며, 이것이 '우주 내에서 인공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에너지로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매우 회의적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있는가 없는가? - 바이너리 binary

처음 분열을 시작한 그 세포 덩어리의 순간은 이제 과거에 있다. 현재라고 인식되는 이 시공간에는 울고 있는 신생아가 이제 엄마의 품으로 옮겨지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는 늙고 병드는 성인이 존재한다. 언뜻 매우 심오해 보이지만 이것이 실상이라고 할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물이 섭씨 100도씨에 정확히 끓는 경우는 아주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고 그냥 믿고 있는 것처럼 실상과 자연을 기술하는 표현에는 의외로 상당한 괴리가 있다.

 

존재론적으로 대상을 특정하는 것은 실상의 수용이 아니라 대상을 기호화하는 행위다.

즉, ‘나’라고 할 만한 것의 실상은 신진대사와 세포분열을 끊임없이 일으키며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 어떠한 연속적인 사태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나의 실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기호화를 하는 것인 셈이다. 과거로 가면 아직 아이인 내가 존재하고, 미래로 가면 분기점에 따라 다양한 노년의 내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일종의 기호학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모든 ‘존재함’은 그것이 처한 환경과 더불어 가능한 것이며 실존하는 모든 대상은 환경과 전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일종의 기호학이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기호학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있는가 혹은 없는가라고 묻는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기호화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묻는 것이다. 유무(有無) 문제의 실상은 기호화의 문제이다. 즉, 존재론적 사고, ‘유무’를 가르는 이원론적 인식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반응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수용을 위한 일종의 ‘방편(方便)’이며, 불교는 이러한 것을 가리켜 ‘일체는 12입처’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좌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어떠한 대상의 기호화다. 상하좌우는 우리가 중력을 경험할 때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어떠한 표준을 근거로 발생한다. 원거리에서, 이를테면 38만km 가량 떨어진 달에서 본다면 지구상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 상하좌우를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下’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구체 sphere’의 밖으로 향하는 운동들이다. 그렇다면 밖 - 하 - 밖 - 밖이 맞을 것이다. 상하좌우란 우리가 특정한 공간적 범위를 한정한 상태에서 각각에 부여하는 기호인 셈이다.

 

시간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여러 요소들을 통해 발생하는데 이것들 중 하나만 떼어내도 동작하지 않으며 부속으로 철저히 분해할 경우 남는 것은 없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시간은 마치 스쿠터 엔진 같다”라고 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인 것이다. 

 

 

과거의 나는 과거에 존재하는가?

시간적 과거란 이처럼 우리가 ‘시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어떠한 변화를 인식하는 방식을 실상으로부터 구분하고 그것을 대상화, 기호화하여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며,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고 방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모델’이다. 즉, 과거에는 과거의 내가 존재한다는 말 자체가 이러한 다양한 여건들을 통째로 무시한 표현이기에 매우 부적절한 기술 description 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지적하듯이, 인류 문명의 꽤나 일관된 오류의 양상은 개념을 실상으로 오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또한 하나의 ‘축’으로 간단히 기술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오류는 우리가 공간의 실상도, 시간의 실상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 또한 ‘패키지’이며, 시간 또한 ‘패키지’다. 기본적으로 분리되어 단순화 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해를 위해 대상을 단순화 한 것을 실상과 혼동하기에 유효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있는 어떤 곳에서

이를테면, 칼텍이나 막스플랑크 연구소 혹은 MIT 같은 곳에서 최소한 수 백년은 견딜 수 있는 소재에

“만일 타임머신을 개발했다면 처음 이 메시지가 쓰여진 시점으로부터 10초 뒤 이곳으로 오세요”라고 적어보면 어떨까? 

 

천 년 뒤에도 타임머신이 개발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문명은 앞으로 얼마 후 필멸할 처지일까?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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