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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AI 시대에 예술하기 - part #5: 인간 양산 사회가 직면한 파국적 현실

인공지능 AI시대에 예술하기

by Photographer Bhang 2025. 2. 11.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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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진법적 사고가 만든 기계적 인간

정답(True) | 오답(False)으로만 사고하는 법을 가르친다. 참과 거짓, 맞고 틀림, 합격과 불합격. 이분법적 연산체계는 컴퓨터에게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간의 사고를 제한하는 가장 기계적인 방식이다. 학생들은 단 하나의 정답을 요구받으며, 주어진 문제를 대할 때 단 하나의 정답을 맞히는 능력을 기준으로 그들의 가치가 매겨진다. 그리고 정답을 맞추며 자기증명을 해온 인생의 어린 나날들을 지난 이후에 만나는 어른들의 현실 세계가 단 하나의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대부분은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만든다. 대화가 불가능해지고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양극단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 바로 어른이 되지 못한 인간들의 세계다.

시험이라는 시스템은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프로그램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을 정확히 입력하면 높은 점수를 받고, 그렇지 않으면 ‘에러(Error)’가 발생한다. 창의적 발상은 시스템에 없는 예외 처리(Exception)로 간주되며, 그것은 감점의 대상이 된다. 학생들은 주어진 입력(Input)에 따라 예측 가능한 출력을(Output) 내놓도록 훈련받는다. 즉, 기계처럼 동작하는 것이 우수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결국 양극단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 바로 인간이 되지 못하고 기계로 전락한 인간들의 세계다.

우주는 0과 1로만 나뉘지 않는다. 입자는 동시에 여러 위치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따르면 수학에서조차 단순한 참과 거짓으로 판별할 수 없는 불완전성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시스템은 마치 인간의 사고를 기계적 연산 체계에 맞추듯 ‘단 하나의 답’을 찾도록 강요하고 있다. 우리가 기계 지능의 시대를 그토록 불안하게 느끼는 까닭은 ‘대체’라는 키워드로 설명된다. 즉, 나의 가치와 의의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 생각인 것이다. 결국 그것은 양산형 인간들로 만들어져 True 혹은 False 의 2진법적 판단을 벗어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세상을 설명하는 키워드인 것이다. 특별히 물리학에 관한 진보는 우리가 관측이전, 미결의 상태로 있는 우주, 그 현실의 특성을 조금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는 통찰로 받아들일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사회,  가능성을 닫아버리다

인간은 2진법적 사고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사고하는 인간을 원하는가, 아니면 정답을 출력하는 기계를 원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정답을 고르는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학습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곧 사회가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이어지며,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를 억누르는 결과를 낳는다. 학교에서 객관식 문제를 푸는 아이들은 과학, 역사, 문학을 단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물이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을 정답으로 암기하고, 뉴턴의 역학 법칙을 배우지만, 그것이 합의를 통해 도출되었다는 과학사적 사실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확장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경우도 흔하다. 역사는 단 하나의 서술 방식으로 주어지고, 문학의 해석은 정해진 틀을 벗어나면 감점 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 앞에서 무력해진다. 복잡한 사회적 갈등, 다양한 삶의 방식, 다층적인 정치적 입장 앞에서 사고가 멈춘다. “이 문제의 정답은 무엇인가?“라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모호함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빈틈을 단순한 이분법이 채우게 된다. 정치적 성향은 진보와 보수로 나뉘고, 사회적 이슈는 찬반 논쟁으로 축소되며, 한 사람의 가치는 단순한 수치로 환원되는 몰락을 경험한다.

과학, 철학, 예술의 발전은 단 하나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정답을 의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과정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우리 사회가 그런 태도를 불편해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가?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효율성을 강조하며, 모호함을 제거하는 것이 곧 ‘합리적인 사회’라고 믿는 믿음이 필요해 따른 선택이 아닌 맹신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은 시험 문제가 아니다. 답이 하나뿐이라면, 우리는 기계가 될 뿐이다.

이제는 단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교육과 그러한 교육을 토대로 형성한 사회를 의심해야 할 때이다. 지식은 완결될 수 없으며, 모든 문제에는 다양한 접근법과 해결 방식이 존재한다. 다양한 관점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 한 가지 해답을 넘어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때, 우리는 더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더 많은 가능성을 탐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생존 전략이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을 원한 사회의 비극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다른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적 입장은 단 두 가지로 나뉘었고, 이념의 스펙트럼은 극단의 양 끝에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중간은 없고, 고민의 여지도 없다. 어느 한쪽에 서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나의 정답만을 찾으려는 문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결과다. 진보 | 보수, 개혁 | 수구, 애국 | 반역, 우리 | 그들.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무엇을 주장하기도 전에 배제됨을 경험할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정치는 본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를 조율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은 대화가 아닌 전투로 변질되었다. 선전전이 되었고, 진영 간 충돌만이 남았다. “네가 내 편이 아니라면, 너는 내 적이다.” 이 논리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작동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상대의 말을 듣기도 전에 “틀렸다”고 판단하게 되었을까? 하나의 진리만을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온 결과가 아닐까? 심지어 과학과 역사 해석에서도 하나의 진리만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기보다는, 정해진 하나의 틀에 맞지 않으면 “반대편의 논리”로 간주되고 공격당한다. 이 과정에서 대화의 기회는 사라지고, 상대의 논리는 고려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알고 싶은 정보만 접하고, 불편한 의견은 차단하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만 교류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고 현실이 아닌가?

 

기계적 사고에 갇힌 사회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색채와 더 많은 해석이 허용되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예술은 감정과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다름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어버린 대화와 공감을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 AI 시대에 예술하기란, 테크놀로지 의존적으로 프롬프트나 알고리즘을 사용한 결과 출력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분법적 사고 벗어나기의 훈련이다. 이분법적인 사고, 이진적 연산체계와 같은 사고방식은 종국에 우리를 인간이 아닌 생체기계로 전락시킬 것이다. 이는 단순히 '대체'라는 키워드로 설명되는 현상황보다 복잡한 문제다. AI의 등장이 왜 두려운지 이제 조금 알 듯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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