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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의 프리렌(葬送のフリーレン)>과 만나는 노장(老莊)

생각의 자리

by Photographer Bhang 2025. 6. 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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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작품은 종종 고대 철학의 깊은 수원지로부터 영감을 길어 올려,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 조건과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곤 한다. 이것은 작가에 의해 의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개별 감상자 혹은 감상자들이라는 집단 지성을 통해 그 해석의 틀로 동작하기도 한다.

나는 최근 <장송의 프리렌(葬送のフリーレン)>을 다시 보았다. 2023년 10월 ‘넷플릭스’를 통해 스트리밍 되기 시작할 때, 이야기의 독특한 시간 전개, 음악과 작화를 통해 영겁의 세월을 사는 ‘프리렌’의 잔잔하지만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이 작품은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리즈를 다 보았을 때 ‘마왕을 물리친 영웅들’의 행동이 나에게 떠올리게 만든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작품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인상으로 감상의 한 부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마왕 토벌 이후, 영웅의 죽음 뒤에 남겨진 엘프 마법사 프리렌의 수백 년에 걸친 여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 시간의 흐름, 기억의 무게, 관계의 의미라는 보편적 주제를 독특한 방식으로 탐구한다. 나는 그 서사 속 강물의 흐름처럼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유가 은은하게 배어들어, 우리에게 깊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힘멜의 길: 무위(無爲)로 그려지는 리더십

<장송의 프리렌>에서 고인이 된 용사 ‘힘멜’은 프리렌의 기억과 그가 남긴 흔적들을 통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정신적 지주로 존재한다. 힘멜의 리더십은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덕목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는 마왕을 토벌하여 세계를 구원하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했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에 있어서 결코 인위적인 강제력이나 과시적인 권위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여정 중에 마주치는 수많은 마을과 공동체의 개별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그들의 문제 해결을 돕되 결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침해하거나 자신의 기준으로 획일화하려 하지 않았다. 마물을 퇴치하여 마을의 평화를 되찾아준 후에도, 그는 그 마을의 통치자로 군림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애쓰기보다는, 공동체가 스스로 자생적인 질서를 회복하고 자연스럽게 발전하도록 최소한의 필요한 도움만을 제공했다. 이는 노자가 말한, “공을 이루고 일이 완수되어도 백성들은 모두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고 말하게 하는” 리더십, 즉 리더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성과를 달성하게 하는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한, 힘멜은 마왕 토벌이라는 전대미문의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에 기대어 현재의 권력이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이룬 평화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기를 바랐으며, 평범한 모험가처럼 끊임없이 "작은 선행들"을 이어갔다. 심지어 그가 대륙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행위조차, 함께 했던 동료들과의 여정을 기억하고, 특히 홀로 오랜 시간을 살아갈 프리렌이 미래에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의 지혜

그의 리더십 스타일은 강압적인 명령이나 통제보다는 부드러움과 끈기로 주변 사람들을 감화를 실현한다. 이는 물이 바위를 뚫고, 유연한 것이 강직한 것보다 오래 지속되는 자연의 이치에서 비롯된 통찰이다. 힘멜의 꾸준한 친절, 변함없는 낙천성, 그리고 진실된 공감은 강철같은 무력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여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심지어 오랜 시간 동안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프리렌의 내면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마왕은 자연 질서와 평화에 대한 심각한 교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힘멜 일행의 마왕 토벌은 이러한 거대한 불균형을 제거하여 공동체와 개인이 '자연(自然)'스러운 상태, 즉 평화롭고 자족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회복적 유위'였다. 이 근본적인 장애물이 제거된 후, 그가 마을에서 보여주는 최소한의 개입과 자율성 존중의 태도는 노자의 '무위'에 훨씬 더 가깝다. 이는 '무위'가 단순한 무행동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불필요한 강제력을 피하는 원리임을 시사한다.

 

프리렌의 여정: 소요(逍遙)와 물화(物化)로 수놓는 삶의 풍경

장자는 인위적인 규범, 고정된 가치관,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절대적인 정신적 자유를 누리며 자연 그대로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소요유(逍遙遊)’의 경지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다. 프리렌의 끝나지 않는 여정과 그녀의 내면적 변화는 시간조차 붙잡을 수 없는 그녀의 자유를 보여준다. 

수천 년이라는 긴 수명을 지닌 엘프 프리렌은 이야기의 초반, 인간의 짧은 생애와 그들이 덧없이 여기는 찰나의 감정, 관계의 의미에 대해 다소 무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힘멜과의 10년에 걸친 마왕 토벌 여정조차 그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힘멜의 죽음과 그로 인한 깊은 상실감은 프리렌에게 큰 전환점이 된다. 그를 "더 알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으로 시작된 프리렌의 새로운 여행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교감하며 자신의 존재론적 경계를 확장하고 변화해가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는 더 이상 고정된 자아에 머무르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 과거의 기억과의 대면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정의해간다. 엘프라는 절대적 소수자이자 관찰자의 입장에서, 하찮고 무의미하게 보였을지도 모를 인간들의 짧은 생애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로애락이, 여정을 통해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하고 의미 있는 우주임을 알아가는 과정은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는 깨달음의 한 단면이다.

프리렌이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때로는 지극히 사소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마법들을 수집하는 행위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쓸모없어 보이는 것 속에 진정한 큰 쓸모가 숨겨져 있다는 역설적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배우고 사용하는 "꽃밭을 만드는 마법"이나 "옷을 깨끗하게 하는 마법" 등은 전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타인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며, 일상의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이는 세속적 유용성의 잣대를 넘어, 존재 자체의 가치와 삶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그녀의 여정은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효율적으로 질주하기보다는, 길 위에서의 만남과 발견 그 자체를 즐기며 세상의 다양한 풍경과 인간 군상을 관조하는 듯한 ‘소요(逍遙)’의 정취를 풍긴다.

 

<장송의 프리렌> 속 노장

<장송의 프리렌>은 힘멜이라는 인물을 통해 겸손하고 이타적이며 공동체의 조화와 자율성을 존중하는 리더십의 이상을 현대적으로 구현해낸다. 동시에, 주인공 프리렌의 영원과도 같은 여정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고정된 관념과 속박에서 벗어나 세계와 진정으로 교감하며 자아와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아 나서는 사유의 광활한 공간을 펼쳐 보인다.

주목할 점은, 힘멜이 남긴 ‘덕(德)’의 유산이 프리렌의 ‘도(道)’를 향한 깨달음의 여정에 중요한 이정표이자 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힘멜의 이타적인 삶과 그가 남긴 기억들은 프리렌으로 하여금 인간과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그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 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윤리적 실천의 강조와 개인의 내면적 자유와 정신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장송의 프리렌>이라는 서사 안에서 어떻게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더욱 풍요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힘멜이 추구했던 "즐거운 모험"이라는 가치는 어쩌면 평화롭고 소박한 공동체의 이상(소국과민)과 자유롭고 유쾌한 삶의 태도(소요유)가 아름답게 조화된 경지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기억'과 '유산', 그리고 '망각'이라는 테마는 힘멜이 그토록 자신의 존재와 여정이 기억되기를 바랐던 것이 단순한 명예욕을 넘어, 그가 남긴 평화와 가치들이 프리렌과 미래 세대에 소중한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즉 '공성이불거'의 염원이었다는 점은 그것조차 성취로 여기지 않았던 그의 커다란 심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프리렌이 과거의 기억들을 현재로 소환하여 곱씹고 재해석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장자적 '물화'의 한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녀는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영원 속에서 유한한 삶의 가치를 발견해나간다.

 

수많은 판타지 명작들이 그러하듯, <장송의 프리렌> 또한 단순한 판타지 서사를 넘어, 깊은 지혜가 현대인의 고독한 마음과 복잡다단한 사회에 어떻게 따뜻한 위로와 빛나는 통찰을 건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우리는 용사 힘멜의 삶과 리더십에서 타인을 섬기고 공동체의 조화를 이루는 포용력과 겸양의 미덕을 배우고, 프리렌의 길고 외로운 여정 속에서 세속적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아와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자유로운 정신과 깊이 있는 성찰을 발견한다.

힘멜이 보여준 '드러나지 않는 리더십'과 '작은 선행'의 축적된 힘, 그리고 프리렌이 깨달아가는 '관계 맺음의 소중함'과 '무용해 보이는 것들의 가치'는 파편화되고 경쟁적인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진정한 리더십의 본질, 그리고 개개인의 삶이 지닌 고유한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장송의 프리렌>은 고대의 지혜와 현대적 서사의 성공적인 만남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도(道)'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의미와 방향을 성찰하게 만드는, 깊고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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