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패턴, 천천히 변화하는 소리의 풍경, 때로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사운드, 1960년대 등장한 미니멀리즘 음악은 단순한 사조를 넘어, 이후 수십 년간 현대 음악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방향성’은 단순히 음악 스타일의 변화를 넘어, 미니멀리즘의 핵심 원리가 어떻게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기술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미니멀리즘 음악’을 키워드로 우리는 음악 창작에서 수학적, 체계적 접근이 갖는 의미까지 탐구하며 미니멀리즘의 광범위한 영향력을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1960년대 미국, 특히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테리 라일리(Terry Riley),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같은 작곡가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복잡했던 현대 음악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니멀리즘의 등장은 당시 미국 실험주의적 반문화(counterculture)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오케스트라, 콘서트홀 등 전통적인 음악 제도와는 거리를 두었다. 또한, 비서구 음악(특히 인도 고전 음악의 리듬 개념이나 드론)과 철학, 그리고 팝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초기에는 지역적 차이도 나타났는데, 뉴욕을 중심으로 한 작곡가들(라이히, 글래스)은 맥박과 과정에 더 집중한 반면, 캘리포니아 기반 작곡가들(라일리, 영)은 드론(drone) 기반의 즉흥적인 음악이나 공동체적 성격의 음악을 탐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음악의 재료를 최소화하고 반복, 점진적인 변화, 지속음(drone), 그리고 명확하게 들리는 구조에 집중했다. 라이히의 '위상 이동' 기법, 글래스의 'additive process', 라일리의 테이프 루프 실험, 영의 극단적인 드론 탐구는 모두 소리 자체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새로운 청취 방식을 제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시 반문화적 분위기와 비서구 음악, 초기 전자 기술의 영향 속에서 탄생한 혁신이었다.
미니멀리즘의 영향력은 클래식 음악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그 원리들은 실험음악, 앰비언트, 전자음악, 테크노, 록 등 다양한 장르로 스며들며 변형되는데, 초기 미니멀리즘이 '과정' 자체의 명료함을 강조했다면, 후대의 많은 음악, 특히 앰비언트나 전자음악에서는 소리의 '질감'이나 '분위기' 조성이 더 중요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음악 듣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복과 느린 변화는 우리를 음악에 깊이 '몰입'하게 만들고, 일상적인 '시간 감각'을 왜곡하거나 확장시킨다.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 대신, 우리는 '소리 자체'의 미묘한 변화, 질감, 울림에 더 집중하게 된다.
여기서 놓치지 말고 생각해야 할 것은 미니멀리즘 기법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듣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기능은 크게 달라진다. 사실 현대의 많은 예술 장르들이 이러한 ‘맥락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스티브 라이히의 콘서트홀 작품에서 '반복'은 구조적 과정을 드러내는 지적인 장치일 수 있지만, 클럽에서 듣는 강렬한 '반복' 리듬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최면적인 그루브가 되는 것이다.
음악 기법의 미학적 의미는 그것이 놓인 공간, 사회적 환경, 그리고 우리의 듣는 방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고, 현대 예술의 많은 분야들은 이러한 맥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그러한 특징을 가진 대표적인 장르 중 하나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미니멀리즘 원리의 변용(variations on the principle of minimalism)’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를 꼽는다. 그는 '앰비언트 음악 ambient music'이라는 개념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노’는 앰비언트 음악은 흔히 알고 있는 배경음악(BGM)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환경을 덮어버리는 거나 특정 요소들을 강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평온함과 사색의 공간"을 만드는 음악이라는 주장이다. 그의 유명한 말, "무시할 수 있는 만큼 흥미로워야 한다(must be as ignorable as it is interesting)"는 앰비언트 음악의 핵심 철학을 보여준다. 배경처럼 흘려들을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으면 미묘한 변화와 질감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유연한 청취를 가능하게 하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경(foreground)과 배경(background)의 경계를 허물고, 청취자와 음악, 환경을 하나로 묶는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 가려는 시도인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과정 중심적 사고는 음악 창작에서 수학적, 체계적 접근을 탐구하는 다른 흐름과도 연결점을 갖는다. 알고리즘 작곡이나 생성 음악(generative music)은 미리 정의된 규칙이나 절차를 통해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안니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는 확률 이론, 집합론 등을 사용하여 '확률 음악(stochastic music)'을 만든다. 그는 이를 통해 전통적인 음악의 결정론에서 벗어나 자연 현상과 같은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음악에 담고자 했다. 그는 그림을 소리로 변환하는 인터페이스인 UPIC(Unité Polyagogique Informatique CEMAMu)라는 시스템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적 접근은 객관성 추구, 인간 직관의 한계 극복, 형식적 가능성 탐구 등 다양한 철학적 동기를 갖는다. 더불어 음악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인지, 즉 창의성과 저자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작곡가는 시스템 설계자인가, 아니면 시스템과 협력하는 사람인가? 이러한 질문은 생성형 AI가 일반화 되고 있는 현시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미니멀리즘 이후의 흐름을 보면 크게 두 가지 방향성으로 정리 가능하다는 것에 큰 이견은 없을 듯 하다. 하나는 라이히나 미니멀 테크노처럼 ‘체계적인 과정'을 중시하는 접근이고 , 다른 하나는 펠드먼이나 앰비언트 음악처럼 ‘직관적인 질감'과 '정체(stasis)'를 중시하는 접근이다.
이 두 방향성은 리듬, 질감, 형식, 시간 인식, 청취 방식 등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과정 중심 음악이 명료한 구조와 추진력을 갖는다면, 질감 중심 음악은 분위기와 미묘한 변화, 공간감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통제와 예측 가능성을 중시하는 태도와, 우연성이나 소리 자체의 현존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를 반영한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현대 음악의 DNA에 깊이 새겨진 원리들의 집합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반복, 과정, 질감, 드론 등의 아이디어는 다양한 장르와 기술, 철학적 사유와 만나 끊임없이 진화해왔으며, 그 핵심에는 '시스템'과 '직관', '구조'와 '경험(혹은 붕괴)' 사이의 생산적인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긴장이야말로 미니멀리즘이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며 현대 음악의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미니멀리즘의 여정은 음악이 어떻게 시대를 반영하고, 기술과 상호작용하며, 우리의 듣는 방식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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