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그 표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식을 세상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게 된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때문에 인간의 다양한 표현활동들은 그것이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 여부를 떠나 우리를 우리 자신답게 만들어준다는 점에 매우 중요한 활동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나 자신을 관조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며, 이를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차원을 개발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나는 나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처럼, 혹은 나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 담긴 어떠한 '글'처럼 자신에 관해 오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어떠한 생각의 창 windows 과 같은 역할의 예술을 해보고자 하였다(한다). 그러던 중에 우리 사는 세상, 이 지구상의 식물들의 상당수가 녹색인 이유에 관해 정리된 내용을 보며 떠올린 생각들을 작품으로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2019년 작업에 이은 2020년 사진 연작은 "먼 옛날 바다에서 생겨난 생명이 에너지를 찾아 햇빛을 향해 수면으로 떠오르던 태고의 감각처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태양과 지구상 생물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나름대로 선택한 문장이다. 문장은 아론 구즈코브스키(Aaron Guzikowski)가 감독하고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이 제작에 참여한 <Raised by Wolves>라는 시리즈에서 기본이 되는 문장을 가져와 수정했다.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초기 생명체는 신진대사의 결과물로 산소를 뿜어 오늘날 지구의 환경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식물의 형태로 점차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대기의 산소 농도는 점점 올라가고 산소를 에너지로 사용하는 생물들이 등장한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태양과 지구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태양복사에서 가장 강한 부분에는 우리가 '가시광선'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존재한다. 우리가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영역의 빛을 통해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태양에너지와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결과다. 문제를 단순화하여, 만일 우리 태양계의 태양이 지금과는 다른 영역에서 에너지 피크를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빛의 다른 파장을 이용해 세상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가시광선의 정의는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우리 지구상의 식물들 다수가 녹색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태양에너지에서 가장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빛의 파장은 녹색으로 보이는 영역이 그에 해당한다. 즉, 빛의 녹색영역을 반사하기 위해서 식물의 잎은 녹색이 된다. 녹색은 광합성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이며, 태양과의 상호작용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세상 수많은 존재의 근간에는 '상호작용(相互作用, interaction)'이라는 과정적 원리가 자리하고 있다.
가시광선에서 에너지 효율이 가장 떨어지는 파장은 '녹색'으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따라서 식물들은 이 파장대의 빛을 흡수하지 않기 위해 '녹색'을 띈다.
녹색' 선택의 원인은 매우 부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연작 응시 #1: www.bhangyoungmoon.com/the-contemplative-contemplation-01
기술적으로 보면 우리 눈은 굉장히 이상하게 설계된 기관이다. 케빈 애쉬턴(Kevin Ashton)은 관찰과 창조력이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우리 시각과 시각 인식 과정을 설명한다. 상을 맺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계적으로 보면 대물렌즈 역할을 하는 위치에는 혈관들이 줄줄이 지나가고 있다. 뇌의 시각피질은 뒤통수 쪽에 있다. 시신경은 정보를 1/10 수준으로 압축하고, 뇌는 1/3000 정도만 골라서 수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부하가 걸리지 않고, 스트레스 조절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다. 눈은 보기 위한 기능을 하지만 보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면 쉽게 이해된다. 인간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설계할 때에는 분명한 기능과 목적성을 목표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케빈 애쉬턴은 역사적 맥락을 통해 혁신의 과정을 아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과정들을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의 연구와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것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우리에게 강력하게 다가오는 창의적 발상, 혁신의 결과물들이 등장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가 영장류의 진화에서 비롯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공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실질적인 성취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존기술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종종 인간의 지능과 고등한 사고를 지구상 다른 생물들과 완전히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접근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점이 최근의 연구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흔히 저지르는 사고의 문제로 인해 기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그 전제 premise 와 심상 image 에 잘못이 생긴다.
케나 우파니샤드에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눈들이 본다. 바로 그것이 브라흐만이라고 너는 알아야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어떠한 기능과 작용을 근본적인 성질로 상정하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접근 방식으로 이는 사실 매우 강력한 추상화의 방법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전제에 오류를 심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요는 이것이다. '본다'라는 것 자체가 어떠한 고유한 기능 혹은 성질이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하나의 과정이고 상호작용이다. '본다'라는 프로세스는 우리가 어떠한 특정한 환경 안에서 적응하여 획득한 하나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 때문에 케나 우파니샤드와 같이 '눈'이라는 감각 기관과 '보는 행위'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은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가 지적하는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 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 혹은 무한소급을 멈추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장치로 보아야지 그것을 정말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되면 또 한 번 오류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오류는 심오함 혹은 신비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기에 자칫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알게되었다는 엉뚱한 상상을 하도록 만든다. 단지 개념의 증대가 일어났을 뿐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는 점은 잊은 채 말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어떠한 존재 혹은 작용의 상정은 무한소급을 멈추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유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기관의 발달과정과 그 해부학적 특징 그리고 시각 정보가 뇌에 도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앞서서 언급한 바와 같다. '눈은 보기 위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보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상을 빛의 특정한 파장을 통해 인식하는 과정과 관련해 우리가 사는 이 우주, 이 세상에 어떠한 근본 기능을 가진 참나 true-self 와 같은 '존재함'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인식은 대단히 인간 언어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각 기관이 수많은 세월과 다양한 변수들 속에서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발달하여 현재의 형태를 얻은 것처럼, '본다'라는 인식에 관한 해체는 역으로 그러한 복잡한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즉,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어떠한 감각기관을 통한 행위에 '본다'라는 정의를 내려주고 합의한 것이지 어떠한 근본적이고 순수한 의미의 '보는 행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눈에 맺힌 상을 뇌로 해석하는 행위를 '보는 행위'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우리의 이러한 실수들은 상상력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지구상의 생물들의 신체가 대칭성을 갖는 경향이 있고, 산소를 이용해 신진대사 에너지를 만드는 등의 특징 등은 우리가 흔히 SF에서 보여지는 다른 세계의 생명들에도 적용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대기와 같은 성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기체'를 이용하여 신진대사 에너지를 만든다는 가정, 대부분이 대칭형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좌우의 눈, 양팔, 양다리) 등은 우리가 매우 우리를 중심으로 우주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인식하기 위한 통로 중 하나인 '본다'는 행위에 대한 전제 또한 그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성립 과정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 더 다양한 관점을 취하고,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인도철학은 실재에 관한 '其體'적 사고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도의 언어적 전통과도 관계가 깊다. 이것은 '나'의 실체는 불변하는 동일성, 그러한 자기 정체성을 갖는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보여지는 현재의 나를 표현하는 다양한 것들, 이를테면 나의 생각, 나의 모습 등은 불변하는 나의 자기정체성 위에 만들어진 어떠한 현상들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무한소급 infinite regress arguments 을 논리적 오류로 보는 철학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한소급을 중단할 수 있는 장치를 '전제'로 또한 '해결 방법'으로 도입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생각과 그것을 제일원인(第一原因)으로 단순화하는 방법을 긍정하도록 하는데, 이 때문에 만물의 근원인 '신'과 같은 전제가 해결방법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무한소급'이 논리적 오류라는 점을 이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일원인'이라던가 '선형적 인과 linear causality'가 문제라는 관점으로는 접근 시도를 잘 하지 않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즉, 논리적 오류를 피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을 해결책으로 삼고 거기에 우주를 끼워맞추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인도인들의 언어관에 아주 잘 드러난다. '산스크리트어'라는 이름은 어떠한 제식을 위해 준비된 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의 언어가 그 언어가 발달한 지역 혹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이나 사회구성원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취하는 것과 달리 매우 독특한 방법이다. 그리고 인도아리안들은 자신들의 제식이 우주를 운행하는 원리라고 믿었다.
말 그대로 우주를 자신들의 언어 속에 끼워맞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인간은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는 명제의 관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사실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로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이르는 인류 분화(分化)의 과정은 직립 보행이라는 기본적 특징이 보임과 동시에 여전히 현생 인류와는 커다란 지능 격차를 보였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호모 하빌리스에 관한 연구는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계획'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예가 등장한다. 이를테면 단순히 깨진 돌을 이용하는 석기 이외에도 특정한 목적의 돌을 구하기 위해 몇 킬로미터를 이동하고, 그렇게 획득한 석기를 가지고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다는 점은 호모 하빌리스의 특징이다. 즉, 계획과 예측을 바탕으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마이클 토마셀로(Michael Tomasello)는 대형 유인원들의 행동 관찰을 통해 이들의 지능에 관해 보여준다. 우리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지능을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러한 경향이 오히려 우리 자신이 가진 지능의 특징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마이클 토마셀로는 각 개체가 가진 고등한 지능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도식적 인지표상, 인과적이고 지향적인 추론, 행동적 자기 관찰을 제시하고 인간이 아닌 대형 유인원들도 이러한 지능이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실험과 논증을 통해 보여준다.
도식적 인지 표상이란 개별적인 경험을 추상적으로 다루는 능력을 말하며, 인지적 표상을 통해 지향성을 가진 추론을 하는 것은 인간 외의 동물들도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자신의 의사 결정 과정을 관찰하는 것도 가능한데, 이러한 점을 통해서 생물이 가진 지능의 기본적인 목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가능성을 높여주고 그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시뮬레이션이다.
우주는 기본적으로 원인에서 결과로의 이행이라는 원인/결과 이분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우주의 모습이다. 때문에 물리학자들을 말한다. 우주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이 우주를 이해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발달한 것이라고. 확률분포, 중첩, 얽힘과 같은 '비상식적'인 우주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실체이며 우리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매우 투박하고 부정확한 방법임을 일깨우는 듯 하다.
생물이 원인과 결과를 상정하는 시뮬레이션을 중심으로 그 지능을 발달시켜 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이것은 생물이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피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우리가 우주를 만든 만물과 만상의 원인인 '신'을 상정하는 것과 나무 위에 있는 열매를 따먹을 궁리를 하는 것은 같은 지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양은 소수점 둘째자리에서 반올림하면(to round to the second decimal place) 99.86%라는 비율로 태양계의 질량을 차지한다. 나머지 0.14%에 행성, 위성, 소행성 등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 0.14% 중에서도 일부인 지구 위에 들러붙어 살고 있으면서 우주를 심상하는 지성을 달성한 것이 우리 인류임을 돌아볼 때 이것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지능이 기본적으로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을 달성하기 위해 발전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전한 지능은 점차 자기 행동에 대한 단순한 자기관찰에서 그 자기관찰에 대한 관조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소위 meta- 라는 접두사가 사용되는 표현들로 기술되는 것들이 가능해진다.
나무 위의 열매를 따먹고, 공격을 피하고, 좀 더 쉽게 적을 물리치고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이제 우리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대답을 향해 가기도 한다. 열역학 법칙처럼 지능의 발전에도 어떠한 방향성이 있는 것일까? 세포에서 일어나는 전기가 다양한 신체 기관들과 상호작용하여 자신이 태어난 별 밖으로 날아갈 수 있는 기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신기하지 않은가?
정말 무한한 신비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다양한 형태로 뻗어나가며 상상을 넘어서는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산소 25.5 %, 탄소 9.5 %, 수소 63 %, 질소 4 %, 칼슘 0.2 %, 인 0.2 %, 칼륨 0.07 %로 이루어진 인체는 흔한 성분들의 조합이 아닌 새로운 층위의 계(system)로 작동한다. 어떠한 물질들이 자기 인식을 하고, 자신보다 커다란 세상을 인식하며 그 의미를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신비다.
나는 '본다'라는 행위를 주제로 하는 8점의 작품을 통해서 '본질'과 같은 단순무료(單純無聊)한 생각에 빠지지 않고자 했다.
우리가 이러한 신비를 풀어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한다면 이 다음으로 가야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우리 지성의 특징을 이해하고, 상호작용 속에 내재하는 수많은 신비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도전을 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연작 응시 #1: www.bhangyoungmoon.com/the-contemplative-contemplat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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