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단순한 편리함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인간 존재의 조건을 재구성하고,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끊임없이 변화시켜왔다. 무선통신 기술의 초기부터 인공지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술적 돌파구는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동시에 예기치 못한 문제를 초래했다. 기술의 진화는 확장과 제약, 가능성과 위험, 창조와 파괴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19세기 말, 한 젊은 발명가가 전파의 힘을 빌려 보이지 않는 신호를 하늘로 쏘아올린다.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Giovanni Maria Marconi)의 무선 전신은 공간과 거리에 대한 한계를 무너뜨리며 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신가로 찬사를 받았고,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인간 소통의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 기술은 항상 양면적인 측면이 있으며 마르코니의 삶은 그 자체로 이러한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의 삶 역시 단순한 승리의 연대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발명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동시에 그것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전쟁이 다가오며 그의 기술은 군사적 도구로 전환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각국은 무선통신을 통해 전투를 지휘하고, 적의 정보를 차단했다. 기술은 자유를 상징하는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감시와 검열의 도구로도 활용될 수 있었다.
마르코니는 생각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극복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그러나 그의 그러한 낙관은 완전히 빗나갔다. 마르코니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이탈리아의 기술적 발전과 군사적 확장을 돕는 역할을 했다. 한때 혁신의 상징이었던 그는 점차 권력과 엮여가며 기술의 정치적 역할을 고민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무선통신이 인류를 하나로 묶을 것이라는 이상과, 그것이 전체주의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그의 삶은 기술 발전이 갖는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마르코니가 연 무선통신의 문을 더욱 넓혔다. 영상은 눈앞의 현실을 넘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문화를 창조하며, 공공의 담론을 형성했지만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손길은 더욱 강력해졌고, 여론은 조작되었으며, 진실은 더 그 단편만을 확인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광장의 토론이 화면 속으로 들어가면서, 대중은 점차 수동적인 청취자로 변해갔다. 보여지는 사실들의 조각은 그것으로 진실이 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도 있었지만, 사실과 진실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이 둘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는 다시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간은 정보의 중심에 서고, 지식의 문턱이 낮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집안에 놓여있는 단말기를 통해 한 번으로 세계 어디든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한한 자유의 공간은 거대 기업들의 손에 집중되었고, 알고리즘은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고, 데이터는 감시와 기업 광고의 원료가 되었으며, 광장은 가상현실로 변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보여지는 정합성이라는 함정에 빠지며 점차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모바일 혁명은 사람들을 다양한 물리적 공간으로 움직이도록 만든다. 애플의 아이폰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 아이팟(iPod)을 내놓을 때, 아이튠즈(iTunes)로 듣던 음악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는 컨셉을 제시한 바 있다. 스마트폰의 등장, 모바일 혁명으로 지식과 연결이 손바닥 안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편리함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우리의 주체적 역할이 점점 희미해진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워 진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정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인간을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예측하며 통제하기 시작했고, 손쉬운 연결은 더 큰 단절을 초래하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은 더욱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모바일과 인터넷에 둘러쌓인 우리는 정보의 침수를 그리고 침습을 경험한다(Within the grasp of mobile and internet, we experience the deluge and the encroachment of information, BHANG Youngmoon, 2025).
소셜미디어(Social Media, SNS)로 우리는 서로를 더 가깝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우리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과만 묶어 편향을 강화시켰고, 다름은 더 희미해지고 사라져 갔다. 감정은 극단으로 치닫고, 논쟁은 분노의 표출이 되었으며,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더욱더 희미해졌다. 연결은 강화되는 듯 보이지만, 실체는 분열이었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서 있다. AI는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고, 창작과 사고의 영역을 확장할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창의성과 판단력은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로 변형될 것인가?
기술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일반적인 서사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기존의 직업군이 붕괴된다는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기술의 목적은 대체가 아니라 극복이 요점이다. 무선통신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없앴고, 인공지능은 지식 생산의 한계를 넓혔다. 기술이 없애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직면했던 물리적·정신적 장벽이다.
문제는 기술이 직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변화하는 역할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개(Dog)는 인간의 사냥과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동물이었다. 그러나 현대 기술이 감시 카메라와 보안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개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고 변화했다. 개는 더 이상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려동물, 심리적 치료 파트너, 그리고 인간과 감정적 교감을 나누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기술이 개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개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직업의 변화 ≠ 인간 대체
기술 발전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프레임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이다.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노동자들을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의 개념을 변화시켰다. 변화된 노동의 개념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이것은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켰다. 흔히 "세탁기"의 발명이 가져온 사회구조와 정치지형의 변화를 자주 이러한 논의를 위해 제시하듯, AI와 자동화의 시대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일자리의 소멸은 인간의 무가치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이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우리는 21세기 신기하게 동작하는 "세탁기"를 손에 넣었다. 때문에, 정작, 우리가 진짜 우려해야 하는 것은 기술 발전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인간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변화는 필연적이지만, 적응의 방향은 우리에게 달렸다. 한 가지 논의 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복잡해게 얽혀있는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면 사람은 쉽게 편향이나 음모론에 빠지기 쉽다.
기술의 발전을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의 논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생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개념에 가깝다. 진화는 단순히 강자가 살아남는 과정이 아니라, 공진화(Co-evolution)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인간 사회 구조의 경쟁 논리로 잘못 해석하여 인종차별을 비롯한 수많은 문제들에 과학적 근거를 세웠다는 착각이 극단적인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 바로 20세기 초, 중반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과 기술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발전해 나가는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 인류 문명,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바로 '복제'의 성공과 그 일관된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농업 혁명은 씨앗과 그 관리를 통해 식물을 대량으로 길러내어 식량을 충족했고, 산업 혁명은 기계와 사물을 복제하여 제품을 양산했다. 정보통신은 데이터를 복제하여 지식을 양산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기술적 복제와 디지털이라는 방식은 원본과 사본의 차이를 없앴음에 그 핵심이 있기도 하다. 이제 AI 혁명은 이러한 기술기반을 토대로 '지능' 자체를 복제하여 인간의 지적 활동을 증폭시키려 한다.
예술가의 창조성, 과학자의 분석력, 프로그래머의 코딩 능력이 복제되어 무수히 많은 작품, 연구 결과, 프로그램을 쏟아내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그런 세상인 것이다. AI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적 생산물을 '대량 복제'하는 시대를 열 것이다. 복제는 항상 윤리적 질문을 동반한다. 씨앗의 복제는 획일적인 농작물을, 기계의 복제는 획일적인 상품을, 정보의 복제는 획일적인 사고방식을 양산할 수 있다. AI의 '지능 복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창의성은 어떻게 정의될 것인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 복제가 예술 작품의 '아우라'를 붕괴시킨다고 지적했다. AI는 예술 작품뿐 아니라 창작 과정 자체를 복제하며 '창작자의 아우라'를 흐릿하게 만든다. 예술가의 손길, 작가의 문장, 작곡가의 감성, 철학자의 사유까지 알고리즘이 복제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벤야민은 복제 기술이 예술 소비 방식을 변화시키고 대중의 참여를 확대한다는 점도 강조했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AI는 새로운 창작 도구로서 예술과 사고의 유통 방식을 바꾸고 있다. 인간은 창작자에서 AI와 협력하는 '큐레이터'로 변모하며, 사고 구조를 재편한다는 방식의 접근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매체가 인간의 사고와 표현을 '프로그램화'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본다면 AI는 사고 과정을 알고리즘화하여 인간의 창작과 사고를 프로그램화된 과정으로 변환하는 새로운 매체다. 육체노동 자동화에 이어 지적활동 그리고 창작에 이르기까지 인간 고유의 활동들로 정의되었던 프로세스 전반을 자동화하는 것이다. 또한 플루서는 인간이 기술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따르지만, 동시에 그 규칙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AI 시대, 인간은 AI가 할 수 없는 비논리적 사고, 감성적 교감, 윤리적 판단, 사회적 상호작용 등을 통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즉, 게임의 규칙을 재정의하고 규칙을 재확립하는 활동에 핵심이 있다.
인간은 AI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창조하는 '메타 크리에이터(Meta-Creator)'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AI가 지능을 복제하고 사고를 양산할 때, 인간은 그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1938년 인간 문명의 기원과 발전을 '놀이'라는 관점을 제시한 것처럼, 인간은 씨앗을 뿌리고, 기계를 조립하고, 정보를 연결하는 모든 행위는 놀이의 형태를 띤다. 이제 인간은 AI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었다. 이 강력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은 어떤 놀이를 시작할까? 그 놀이의 규칙과 목표는 누가 정의할 것인가? 호모 루덴스는 AI 시대에도 여전히 '놀이'를 통해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단, 이번 놀이는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지능'과 함께 하는 놀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술의 부정적 측면을 연구하는 이유는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철저히 이해해야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혁신가들은 항상 ‘이것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역사는 기술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 위험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관리해야 함을 보여준다. 방사능을 이해해야 핵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 것처럼, AI와 자동화, 알고리즘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미리 인지해야 한다.
기술 혁신의 빛나는 약속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마르코니의 무선 통신은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전락했고, 인터넷은 정보 독점과 알고리즘의 지배를 강화했다. 모바일 혁명은 개인을 데이터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AI는 인간의 지적 능력마저 알고리즘의 복제품으로 전락시키려 한다. 야니스 바루바키스(Yanis Varoufakis)의 경고처럼, 테크노퓨달리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소수의 테크 기업들은 데이터를 새로운 영토로 삼아 권력을 독점하려 하고, 알고리즘은 새로운 농노들을 통제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데이터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디지털 농노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다는 사실도 분명한 현실의 한 측면이다. 우리의 삶은 플랫폼 기업들의 알고리즘에 의해 조종되고, 우리의 생각은 필터 버블에 갇혀 있다. 인간의 창의성과 자율성은 알고리즘의 지배 아래 점점 희미해져 간다. 기술 혁신은 인간 해방의 약속이었지만, 현실은 디지털 봉건제의 악몽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라 생각된다.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이 변화하도록 만든다. 중요한 것은 AI와 자동화가 우리의 역할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다. 기술과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는 이들이 미래를 주도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길을 잃은 자들은 기술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기술과 변화에 대한 오독이, 과거 우리가 진화론을 오독하여 적자생존이라는 잘못된 결론과 정치적 정당성으로 그 오독을 연결해 간 것처럼, 결국 기술이 인간을 사멸시키는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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