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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퓨달리즘과 디지털 시대의 예술

인공지능 AI시대에 예술하기

by Photographer Bhang 2025. 2. 2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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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은 현대 디지털 경제에서 거대 기술기업들이 중세 봉건제의 영주처럼 권력을 행사하고, 일반 대중은 그 디지털 영지 안에서 종속적인 ‘농노’가 되었다는 개념이다. 그리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는 경제학자이자 전 그리스 재무장관(2015)으로, 유럽 금융 위기 당시 긴축 정책에 대한 반대로 주목받은 바 있다. 게임 이론과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며, <테크노퓨달리즘(Technofeudalism)>이라는 저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디지털 봉건제로 변모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마존, 구글, 페이스북 등 빅테크 기업들이 플랫폼이라는 ‘디지털 영지’를 통해 개인들을 통제하고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용자는 플랫폼에 콘텐츠를 창작해 올리지만 정작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소유권도 갖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플랫폼 소유주의 자산 증식에만 기여하는 현대의 농노와 같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권력 구조는 과거 봉건제의 지배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이러한 테크노퓨달리즘 체제에서는 예술 분야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예술 창작물의 유통 경로가 디지털 플랫폼으로 집중되면서, 예술가와 감상자 모두 이 디지털 권력 구조와 알고리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플랫폼 경제, 디지털 농노화와 창작의 최적화 압박

디지털 플랫폼 경제 하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과거와 상당히 달라지고 있다. 플랫폼은 전 세계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되어주지만, 동시에 플랫폼 규칙에 예술가를 종속시키는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창작자들은 작품의 발표 형식과 시기, 분량까지 플랫폼이 선호하는 방식에 맞춰 최적화를 고민하게 되는데, 마치 중세 농노가 영주의 땅에서 일하며 세금을 바쳤듯, 디지털 시대의 예술가들도 플랫폼이라는 디지털 영지에서 콘텐츠라는 ‘수확물’을 바치고 소량의 보상을 얻는 형태로 변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루파키스는 이러한 구조에서 사용자(창작자 포함)가 창작물을 공유해도 소유권을 가지지 못하고 플랫폼 부만 키우는 점을 지적하며 현대의 농노에 비유한다. 이를테면, 창작자들이 수익 창출과 노출을 위해 플랫폼이 요구하는 콘텐츠 분량, 업로드 주기, 광고 친화적 내용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다. 플랫폼 경제 속에서 예술가가 창작의 주인이기보다 플랫폼 생태계의 한 부속물처럼 느껴지기 쉽고, 자유로운 예술 창작보다는 플랫폼이 정한 목표에 최적화된 콘텐츠 생산자로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게이트키핑과 관심경제적 관점에 따른 가치 왜곡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현대 예술의 창작과 감상 양쪽에 강력한 게이트키퍼로 작용한다. 평론가, 편집자, 큐레이터 같은 사람이 예술작품을 선별하고 소개하는 역할에서, 추천 알고리즘, 인스타그램의 피드 정렬,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 생성 알고리즘이 이러한 역할을 상당 부분 대신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알고리즘이 어떤 예술을 볼 것인가를 자동으로 결정하면서, 이용자들은 자신이 알고리즘이 뽑아준 작품만 접하게 되고 다른 작품을 발견할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 알고리즘은 이용자의 이전 시청 기록이나 인기 지표를 기반으로 콘텐츠를 추천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일종의 경계(filter bubble)를 만들고 우리의 감상 범위를 협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결과 새로운 스타일이나 독창적인 예술은 노출되기도 전에 묻힐 위험에 처한다. 인기 콘텐츠일수록 더 많이 추천되고, 덜 알려진 작품은 더욱 가려지는 알고리즘 피드백 루프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의 주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다양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예술이 가진 사회적 기능 하나를 불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알고리즘은 작품 감상 경험을 좌우할 뿐 아니라, 창작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알고리즘 상위에 노출되길 원하기 때문에,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콘텐츠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알고리즘 친화적’으로 바꾸고자 하며, 유행에 맞춰 포맷이 획일화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억양이나 어조까지 비슷해지는 “틱톡 목소리”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이는 알고리즘의 눈에 들기 위해 제작자들이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변형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제 알고리즘이 새로운 검열관이자 기획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가는 조회 수와 좋아요 같은 정량적 지표에 민감해지고, 예술적 가치보다는 플랫폼에서 잘 팔릴 가치를 따라가는 왜곡이 생길 수 있다. 작품의 우열이나 의미도 본래의 미학적 판단보다 정량적 성과로 평가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며, 이는 예술의 중심 가치를 흐리는 위험을 만들고 있다.

 

관심 경제가 만든 예술의 상품화

예술의 상품화자체를 두고는 항상 갑론을박이 존재해왔다. 그러나 예술사 전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술은 과거 의례나 공예 등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다가, 근현대라는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오늘날의 모습과 지위를 획득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가 만든 예술의 상품화에 관한 논의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희소 자원으로 간주하여, 이는 바로 관심을 최대한 끌어모으는 것이 곧 돈이 되는 경제 구조다. 소셜미디어와 플랫폼이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거대한 기업가치를 지니는 비결은 사용자의 관심 시간 자체를 수익화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은 콘텐츠를 소비하며 보내는 시간과 눈길을 ‘지불’한다. 플랫폼은 그 관심을 광고주에게 판매하거나 데이터를 수집해 이윤을 얻는다.

“관심 경졔”는 소위 “관종의 시대”를 불러왔다.

디지털 시대 예술 또한 이 관심 경제의 논리에 깊숙이 편입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예술 작품은 그 예술성이나 사회적 의미와 무관하게, 얼마나 많은 클릭과 조회를 끌어내느냐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 상에서 예술가들은 작품 그 자체뿐 아니라 본인의 일상과 개성마저 브랜드화하여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알고리즘 기반 참여(engagement) 중심 비즈니스 모델에서는 “플랫폼의 규칙에 맞춰 자신을 상품처럼 포장하고, 예술을 소비될 콘텐츠로 만들어야” 대중의 관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 표현이라 할지라도 참여를 극대화하지 못하면 의미 있는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시 대중 친화적으로 리브랜딩하고 재창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이다 . 이처럼 관심을 끌지 못하면 존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예술가들은 점차 자신이 내놓는 작업물을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형식으로 희석시키고, 반복해서 대중 입맛에 맞게 포장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 결과, 원래 작품이 지니고 있던 진정성이나 실험정신 같은 ‘날것의 미학’은 점점 뒤로 밀려나고, 모두가 서로의 관심을 빼앗기 위해 경쟁하는 환경이 조성되는데, 이는 예술가들로 하여금 보다 덜 진솔하지만 대중이 즉각 소비하기 쉬운 자기 이미지를 구축하도록 내몬다. 그렇게 하면 알고리즘이 이를 확산시켜주는 대가로 관심을 보상하지만, 만약 거부하고 자기 길을 가면 곧 잊혀지고 소외되는 두려움을 느끼게 될 수 밖에 없고, 결국 예술가들은 플랫폼을 위해 공짜로 일하며 콘텐츠를 제공하는 구간이 발생하며, 예술은 플랫폼이 거래하는 주의력 상품으로 소비된다.

심도 있는 예술은 설 자리를 잃는 위기에 처하고 있다. 사람들의 주목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콘텐츠의 홍수 속에 깊이 있는 작품이 눈길을 끌기 어려워졌다. 80년대 – 특히 미국사회를 중심으로 – 한 페이지의 신문 칼럼, 30초의 광고에 맞춰진 집중력이 비판되었다면, 이제는 5분짜리 유튜브 영상, 15초짜리 틱톡 클립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오래 곱씹어봐야 하는 난해한 미술 작품이나 여러 번 재생해 음미해야 하는 음악, 혹은 긴 호흡의 문학 작품은 과거 어느 때보다 소비되기 힘들어졌다. 이는 예술의 다양성 감소와 수준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예술이 본래 지니는 충격, 감동, 변화의 힘조회수 경쟁과 상업화된 포장 속에서 희석될 때, 우리 사회는 값진 문화 자산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한다면 과한 것일까?

 

예술의 자율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디지털 시대의 예술은 테크노퓨달리즘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봉건 질서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모두 경험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누구나 플랫폼을 통해 예술을 발표하고 접할 수 있는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룰을 지배하는 알고리즘과 관심 경제 때문에 예술의 본령인 창의성과 자율성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조회 수와 알고리즘에 길들여진 예술 환경은 창작자로 하여금 스스로 검열하게 만들고, 그 실상은 감상자로부터는 다양성을 향유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극복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술적 해법사회적 노력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플랫폼 독점에 균열을 내는 시도가 지속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직접 후원 모델이나 자체 웹사이트를 통한 작품 판매 등은 규모는 작아도 창작자가 주도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시도를 계속 해오고 있지만 솔직히 확실한 성과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예술가와 관객 모두가 현재의 테크노퓨달리즘적 환경을 자각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선택을 할 때 비로소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지킬 수 있다. 거대 플랫폼이라는 무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고, 더 많은 대안들을 실험하며, 예술 고유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버리기는 어렵다.

디지털 기술을 인간 중심적이고 창의성 친화적인 방향으로 활용하고, 다양한 생태계가 공존하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예술이 다시 영주가 아닌 스스로를 따라갈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예술의 자율성을 되찾는 일은 단지 예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화적 자유를 지키는 일이다. 

관건은 편리함과 참여수치에 홀리지 않고 예술가진 핵심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남아있다.

테크노퓨달리즘의 굴레를 인식하고 벗어나려는 노력 속에서 예술은 권력과 알고리즘을 넘어 자유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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