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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시소 CISO 초대전 사진작가 방영문 개인전 작가노트

생각의 자리

by Photographer Bhang 2023. 3. 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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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연작의 바탕이 되는 생각은 세상과 내가 서로를 알아가는 역동적 상호작용의 장(場, field)인

나의 몸을 통해 시도하는 열반(涅槃)의 역설계(逆設計, Reverse Engineering)에서 비롯됩니다.”

 


2023년을 뜻깊게 맞이했던 것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갤러리 시소 CISO 에서 가졌던 초대전 <응시, 공의 감각> - 열반의 역설계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들은 전시를 갖게 되면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찾아주시는 분들이 읽어보시면서 작품을 감상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작가의 글이나 전시서문이 그 자체로 읽기가 쉽지 않거나 혹은 그러한 메시지들을 전하는 맥락을 짚어내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조금 더 쉽고 일상적인 표현을 통해 많은 분들과 소통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모든 말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그대로 혹은 말하는 이, 글쓰는 이의 의도와 달리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풀어써낸 글이나 함축적인 글이 외면을 당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말이 의도와 달리 전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통의 노력을 향해 최대한 나아가려 한다면 마음이 전해지듯 글 또한 점차 풀려가리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지난 2023년 1월 11일부터 2월 1일까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갤러리 시소 CISO 초대전

사진작가 방영문 개인전의 작가노트(전시서문)를 공유하고,

그러한 글을 적어 간 맥락과 의도를 풀어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전시명: 갤러리 시소 초대전 사진가 방영문 개인전

凝視, 空의 感覺

Contemplative Contemplation - the sense of suññata

 

전시서문: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은

한길 몸 안에서 나의 의식이 일어난다는 신비로운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한계의 인식은 나의 독자적 개체성을 알게 해주며

열린 가능성은 그 개체성의 모호함을 드러냅니다.

 

나 자신이 다채로운 운동성의 결과에서 비롯되는 복합체임을 

감각하고 인식하며 또한 체험하는 순간들을 시각화 한 것이

저의 사진연작 <응시, 공의 감각>입니다.

 

이 사진연작의 바탕이 되는 생각은 세상과 내가 서로를 알아가는 역동적 상호작용의 장(場, field)인

나의 몸을 통해 시도하는 열반(涅槃)의 역설계(逆設計 Reverse Engineering)에서 비롯됩니다.

 

저의 고민과 체험을 나누고,

그것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각화하여 메시지로 전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많은 분들께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라는

저의 작지만 소중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2023년의 첫 개인전을 열며

사진작가 방영문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은
한길 몸 안에서 나의 의식이 일어난다는 신비로운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한계의 인식은 나의 독자적 개체성을 알게 해주며
열린 가능성은 그 개체성의 모호함을 드러냅니다.

인격이란 그리고 의식이란 무엇일까? 몸이라는 물리적, 생물학적 여건을 기본으로 생각해 볼 때 그것을 바다와 같다고 한다면, 인격이나 의식이란 바다 위의 물결 즉 파도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정신적인 것, 영혼과 같은 깊이가 존재하고 표면에 드러나는 것들은 우리의 내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관찰의 방법이 더 정교해 갈수록 우리에게 있는 것은 정신적 깊이가 아니라 경험과 감각 그리고 그것들의 누적으로 인해 획득되는, 외부와 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인터페이스 같은 것임이 자꾸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인격동일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우리 안 깊은 곳에 있는 특정점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연결성에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때, 어떤 이들은 염세적 혹은 허무함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이러한 것들을 발견하고 관련된 생각들을 떠올릴 때마다 현상이 보여주는, ‘표층이 보여주는 신비감’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경계를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개체성을 경험하도록 해줍니다. 또한 외부세계와 ‘나’라고 하는 우리 각각이 독특하게 개인화된 신경연결성 peculiarly personalized neural connectivity 이 격렬하게 반응하며 다양한 현상들을 일으키는 과정들을 통해 지평의 확장과 인식의 깊이를 더해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개체성의 모호함, 나의 연결성을 통해 확장되어간다는 것은 개개인의 가능성이란 개체성의 모호함을 향해가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앎’의 획득이란 기준을 모호하게 하고,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 만드는 상호작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욕망의 불을 꺼버린” 상태와 그 모습이 유사하니 저의 작업 여정에서 항상 떠올려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작품 전체의 키워드이기도 한 “운동성”

나 자신이 다채로운 운동성의 결과에서 비롯되는 복합체임을
감각하고 인식하며 또한 체험하는 순간들을 시각화 한 것이
저의 사진연작 <응시, 공의 감각>입니다.

‘空’이란 무엇일까? 이것에 관심을 갖고 고민을 해본 경험을 가진 분들은 많으실줄로 압니다. ‘空’을 운동성으로 파악할 것이냐 존재론적 대상으로 파악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 혹은 논쟁을 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문제를 풀어갈 방법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라는게 저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다만, ‘나’라는 대상을 놓고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나 자신’을 어떠한 존재론적 실체로 파악하려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상호작용이라는 일종의 운동성의 결과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이 들었음을 적어 본 것입니다.

 

‘空’은 운동성, 상호작용 혹은 존재론적 실체로 파악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에 ‘空’이라고 잠시 이름하여 두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 즉, 무엇인가를 고정하기 위해서 개념화하여 ‘제한하고 싶은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두고 ‘공의 감각’이라 이름을 붙여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분리’ 혹은 ‘격리’를 바탕으로 발전해 온 경향을 보여줍니다. 유사언어 혹은 유사문법은 손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행위, 무엇인가를 묘사하는 행위로부터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무엇인가를 묘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손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손이 가리키고 있는 어떠한 대상과 관련한 어떠한 상징화 혹은 지표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부와 술부(subject and predicatie)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상황이지만 이러한 분리를 자세히보면 그것이 얼마나 복잡한 작용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현상, 실체인 ‘손’으로부터 어떠한 ‘의미’가 분리될 때 우리는 언어에 가까운 소통(유사언어)을 하게 되고 그것은 소위 ‘문법’의 전단계(유사문법)가 됩니다.

 

언어의 구조와 관련해 합리적인 추측 한 가지는, 지구상 인류의 언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 - 도상/상징/지표적 특징과 문법의 구조 - 이 전부 공통되는 것은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서 발현되기 시작할 무렵 우리 종(種, species)이 갖는 신경연결 특성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Story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Arrival>에서 외계인들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가 근본적인 차이를 지닌 것은 언어의 발현 그리고 그것을 발전시켜온 단계에서 단순히 개념증대가 아닌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차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연작의 바탕이 되는 생각은 세상과 내가 서로를 알아가는 역동적 상호작용의 장(場, field)인
나의 몸을 통해 시도하는 열반(涅槃)의 역설계(逆設計 Reverse Engineering)에서 비롯됩니다.

 

“열반의 역설계 the reverse engineering of nibbāna”란 제가 이 작업을 구상하고 또한 진행하면서 초기불교경전인 ‘니까야’들에서 발견하는 내용들을 현대적 용어와 과학적 논리로 풀어보는 과정이 그 중점에 있기 때문에 사용한 표현입니다.

 

또한 ‘나’를 특정한다는 것의 모순과 더불어 더더욱이 ‘나의 몸’은 ‘나’로 특정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나의 몸’은 나를 이룰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여건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시작하면서 적어보았듯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떠한 ‘인격동일성’이란 나의 몸에서 형성되는 경험, 감각여건, 가소성 그리고 그것들의 누적인 기억들을 통해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순간순간 매번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지만 네트워크의 모양들이 ‘나’라는 일종의 ‘인경동일성’을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역동적 상호작용의 장’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는 동안 수많은 경험과 생각들의 수단이 되어 준 것은 바로 그렇게 형성되어 나가는 나의 몸에 있었기에, 나의 몸을 통해 시도하는 어떠한 시도들, 이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열반의 역설계 the reverse engineering of nibbāana”라고 부르기로 한 것입니다.

 

저의 고민과 체험을 나누고,
그것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각화하여 메시지로 전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많은 분들께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라는
저의 작지만 소중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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