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 인간이 - 주장할 수 있는 어떠한 것들은 정당성과 당위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그 기반 즉, 토대 foundation 는 대개 자신이 취한 정보들을 정합적으로 묶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즉, 확보한 정보간의 정합성 확립이 딩위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취합하는 각 정보 요소의 당위성은 무엇이 뒷받침하는가? 그것은 각 정보가 참이라는 가정 즉, 그것들이 어떠한 사실이나 진리에 입각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엇가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고, 그 바탕은 결국 감관에 의해 수용된 정보인 것이다.
감관에 대한 수용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장 field 을 바탕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즉, 개별 감각은 개인마다 격차가 있고 조금씩 다르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과 나의 감관에 인식되는 내용이 유사하기도 하다. 같은 노란색을 보며 느끼는 느낌이 조금씩 다르고, 빨간색을 정의할 때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어떠한 대상적 사태들, 말하자면 사물의 명칭, 개념, 색이나 모양에 대한 묘사나 인식을 하는 것은 대개 세부사항에 대한 광범위하고 과감한 ‘무시’를 토대로 한다. 미술가에게 빨간색을 묻는다면, 아주 특정하고 세부적인 ‘빨간색의 한 종류’를 말하게 될 것이나, 이런 부분에 대한 무관심 속에 살아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미술가의 입장에서는 매우 광범위하고 불특정한 ‘빨간색 계통’의 색에 대한 총칭이 된다.
개체가 인식하는 대상을 다른 개체도 인식함을 보장하는 어떠한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상호관계를 구성하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가진 관념의 대부분은 감관을 통해 수용해 지금까지 나를 이뤄 온 수많은 정보들을 근거로 이루어져있다. 감관적 특징, 즉 시각적 표현, 청각적 표현, 후각적 표현, 미각적 표현, 촉각 혹은 통각적 표현을 전적으로 배제한 기술 description 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요중선(鬧中禪)은 소란스런 세상 한복판에서 나홀로 앉아 내적 몰입을 할 수 있다는 측면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우리 감관적 수용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과 관련해 나의 생각을 검증한다는 의미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소모적인 논쟁이 아닌 독단과 독선에 빠져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일종의 안식이나 깨달음과 구분할 때 더할 나위 없이 큰 가르침이 되어주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표준(標準)이 되는 기준점(正位)을 마련할 때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근거로 시작한다. 고대의 길이는 신체조건의 평균값으로 도출한 것들이 많이 있고, 그러한 준거(準據)의 정착은 측정의 정교화를 가져온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미터법에서 1미터는 1793년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천만분의 1이라고 제시하며 시작한다. 190년 뒤인 1983년에는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개정된다. 실상은 순환논리다. 나는 얘다. 얘는 쟤다. 쟤는 나다하고 다를게 없는 소리다.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거리의 천만분의 일이라는 값을 빛의 속도라는 값을 통해 보정해서 정교해진 것이다.
실상을 따지고 들면 ‘토대 foundation’가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처음 제시된 기준은 다른 요소들을 통해 정교화되고, 그 정교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기술들이 등장함에 따라 우리는 이것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실상 하나의 준거(準據)를 정착시키고, 표준(標準)을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은 광범위한 사회활동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사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강화(reinforcement)이며, 우리가 소위 ‘객관’과 ‘표준’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양한 사회화를 거쳐 동의된 내용이 정착된 결과인 것이다. 장하석 교수는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하며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상식은 극점에서 지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경험에 한정된 주장이라는 예를 들기도 한다.
고대의 기하학은 오늘날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표준 길이 단위가 없을 때 만들어졌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생각하는 측정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고방식이었다. 정교한 작도 도구를 이용해 작도가 수학공식과 맞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현대인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니 기하학의 실상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정교한 건축과 측량은 어떠한 영적 세계의 실체를 구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태를 알면 실상이 보인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나 플라톤(Plato)와 같은 철학자들이 경험되는 세계(empirical world)와 관념의 이상세계(ideal world)를 논할 때 기하학적 이론들을 바탕으로 그 세계를 그려 나갔던 것은 측량/ 측정 기술이 당대와는 완전히 다른 현대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실상은 여건의 차이가 철학의 차이를 만든 측면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과 환경은 철저한 개별자가 될 수 없으며 그 접점은 끊어질 수 없다. 우리가 호흡을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자신이 호흡에 얹혀 있음을 감각적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고대 세계를 연구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안에
사람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며
따라서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어떠한 경지 혹은 앎에 있어서 단순히 전적인 몰입과 집중의 상태의 추구가 전부라면 붓다 이전에도 많은 명상가들이 실존했다. 그들은 삶에서 무색계 증득을 근거로 사후 브라만과 합일하는 우주의 미현현적 존재가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무의 논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이러한 문제는 분란의 씨앗이 되기 쉽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은 다양한 인식이 가능한 인간이 가진 시간관념이지만, 신경학적으로 보면 기억은 과거에 대한, 예측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다. 미래의 특정 상태가 정해져서 우리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간다는 관념은 개념적인 편의상의 문제이지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기술하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 구분은 자칫 숙명론적의 함정에 빠져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며, 이것은 오늘 살아있는 모든 개체의 의미를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쉽게 사람들에게 파고 들기에 많은 사람들이 홀로그래피, 시뮬레이션 우주와 같은 모델들을 본래 수학적 모델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서사적 관점에서 보도록 유혹한다.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볼 때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원리들(法)이 보이는 순간순간이 있다. 그리고 점차 더 깊은 앎을 통해 그것이 곧 내가 인식하는 세상이 될 수 있다. 마음의 평화란, 앎의 진수란, (현재의)인간이 이를 수 있는 성취란 종국에 스스로를 통해 이룰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독단에 빠져 세상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단순히 ‘몰입의 증득’이 목적이라면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으며,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맛을 느낄 수 없으며, 감각적으로 마비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그러한 상태나 다름이 없을 수 있다. 그렇기에 먼 옛날 브라만들은 사후 해탈에서 그 단초를 찾고 그곳을 향해 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의 검증, 얻어야 할 앎이란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궁극의 앎? 그것을 왜 묻는가? 혹은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
그렇게 단지 알 수 없는 것을 묻고 무한정 파고드는 과정은 몰입의 전개일 뿐인지도 모른다.
눈을 뜨면 만나는 세상. 사실 우리는 거기에 있다.
단지 소란한 세상 속에서 나 홀로 고고히 고요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의미 또한 엄연히 함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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