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을 쌓고 그 안에 사람들을 모아 특정한 정치제도를 통해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목적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상당히 강력한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함무라비의 '법전'(The Code of Hammurabi) 또한 '마르둑'이 바빌론을 세워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었다는 선언을 그 초반부에 싣고 있다. 페르시아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잡기 전까지 마르둑은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고, 고대근동세계 전반에 그 이름을 알린 신이었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 마르둑(므로닥)의 이름이 '예레미야'에서 단 한 번만 언급되는 연유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알'의 이름을 자주 언급하며 치고받는 모습에 비교해 마르둑(므로닥)의 이름은 단 한 번 나올 뿐인데, 이것은 국력 차이에서 비롯된 일종의 회피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달리 제국적 지위에 있는 바빌론의 주신을 자주 언급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누마 엘리시>는 '시원의 혼돈’의 물과 뒤섞인 두 우주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압수(Apsu)는 물 그리고 티아맛(Tiamat)은 짠물의 신이었다. 이 둘로부터 초대(初代)의 신들이 탄생하는데 이들 신들은 점차 소란스러워져 압수의 평온을 방해하게 된다. 압수는 이들 어린 신들을 파괴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러한 그의 계획이 ‘에아(Ea)’에게 발각되고, 에아는 자신의 어머니의 도움과 함께 압수를 깊은 잠에 빠지도록 만들어 제압한다. 이 일로 에아는 신들의 지배자가 된다. 티아맛은 압수가 에아에게 제압된 사건으로 인해 분노하게 되어 복수를 결의한다. 그녀는 수많은 괴물들을 만들어내고 신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킹구(Kingu)와 동맹을 맺고 - 티아맛의 남편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음 -, 젊은 신들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마르둑(Marduk)’이 이끄는 젊은 신들은 티아맛과 그 동맹들에 대항하여 전투를 준비한다. 마르둑은 다른 신들로부터 강력한 힘을 부여받아 신들의 수호자가 된다. 그는 티아맛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마침내 티아맛을 제압하게 된다. 승리를 거둔 마르둑은 티아맛의 몸을 둘로 나누어 하늘과 땅을 만든다. 그는 또한 우주의 질서를 확립하고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마르둑은 또한 티아맛의 동맹이었던 킹구의 피를 취하여 인류를 창조하는데, 이는 인류로 하여금 신들을 받들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승리와 창조 가운데 그의 역할이 신들에게 알려지자, 신들은 마르둑을 신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 그에게 막강한 힘과 권위를 수여하게 된다.
<에누마 엘리시>는 고대 바빌론의 창조 신화로 세상의 근원과 신들의 탄생에 관해 이야기하는 문헌이다. 이 문헌은 고대 바빌론인들의 그들의 주신(主神) 마르둑의 주권과 세상과 인류 문명을 세운 그의 역할을 향한 신앙을 반영한 문헌으로 이러한 문헌들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은 '왕정신학'이라는 용어가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바빌론'이라는 국가가 생겨날 무렵에는 이미 앞선 문명들이 있었고, 수메르와 아카드의 경우 이미 상당한 문명적 성취를 이루었던 것으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의 서사를 가만히 보면, 바빌론이 그들의 주신 '마르둑'과 그의 활약상을 그린 이야기들을 통해 바빌론의 정당성을 어떻게 주장하고자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현대의 정치가 개인은 물론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서 설득과 합의를 통해 그 정당성을 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면, 고대 국가, 그것도 인류 문명사 가운데 매우 전반에 있는 국가들은 어떠한 '신적 권위'를 통해 그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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