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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போதிதர்மன், 菩提達摩)는 왜 중국으로 왔을까?

시간 여행

by Photographer Bhang 2020. 12. 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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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識(몰라...)

 

달마는 왜 중국으로 왔을까? 사실 알 길은 없지만 그는 중국에 와서 선종을 만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입장에서 보면 28대 조사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가 칸치푸람(காஞ்சிபுரம், Kanchipuram) 출신임을 알고 이후의 흐름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2019년 4월, 첸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초청으로 첸나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타밀어(தமிழ்)권이다. 인도에는 10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가 30개가 넘으며, 헌법으로 인정받는 언어는 22개가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도 아대륙에는 1,6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한다. 타밀어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현재까지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고전 언어 중 하나이다. 현대에도 활발히 쓰이는 언어이다.

첸나이 일정 중 우리를 안내해주고 도와주었던 ‘산제이’씨는 매우 훌륭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고, 그 덕분에 아무런 불편 없이 첸나이 일정을 진행할 수 있었다. Sir Mutha Concert Hall, Chennai 에서 행사가 끝난 날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첸나이 지역이 타밀어 지역이라는 것과 선종의 조사 ‘달마 대사’가 첸나이 출신 - 정확히는 칸치푸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첸나이에서는 첸나이 출신이라고 하는 것 같다 -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상’ 칸치푸람에는 가지 못했고, 마하발리푸람의 힌두교 사원을 다녀왔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에서 마하발리푸람까지는 약 55km 정도, 첸나이에서 칸치푸람까지는 80km 가 조금 되지 않는다. 아마 도로 사정이 좋았다면 칸치푸람을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었겠지만, 첸나이 시내의 교통상황 등은 일정에 맞추어 칸치푸람에 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달마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붓다가 사망하고도 거의 1천년 가까이 지난 시기다. 소승과 대승이 갈라진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고, 초기 불교에서는 금기였던 불상의 조각도 이미 활발하게 진행된 상태였을 것이다. ‘실크로드’가 개척되었고, 후한 시대에는 이미 불경이 중국의 말로 번역이 되고 있었다. 이후에 구마라지바와 현장의 번역을 통해 번역의 완성도가 높아졌고, 그전까지는 중국인들의 사고에서 유추해 받아들이던 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보면, 불완전한 번역과 중국적 사고에 의한 불교의 수용이 중국이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달마(போதிதர்மன், 菩提達摩)는 남인도 사람이다.

"廓然無聖 Bodhidharma said, "Empty, without holiness.”” 벽암록 제 1칙에 등장하는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 중 달마가 양무제에게 던지는 대답이다. 인도의 문명은 말에 의한 문명이다. 그만큼 언어에 대한 집착이 심하고, 개념을 개념으로 계속해 쪼개고, 분석해 들어간다. 이것이 그들이 명상을 하는 방법이며, 그들의 경전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집착 덕분에 ‘아리안 Aryan’이라는 사람들이 세상에 알려졌고, 기원전 1,500년 경 베딕과 산스크리트어가 존재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대표적인 오용을 하는 사례는 히틀러와 나치 그리고 창조과학회의 주장이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Homo Heidelbergensis 가 형태를 갖춘 언어를 처음 발달시켰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거의 60만년 전이다. 스스로를 아리안이라고 부른 사람들은 인도-유러피안 중에서도 BMAC, 이란, 인도로 이주했던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고학자 데이비드 앤서니 David Anthony 는 이란, 인도의 인도-유러피안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부르던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남인도 사람들은 인도 아대륙에 산스크리트어가 유입되기 이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이며, 기원전 3,300-1,700년 경 북부에도 이미 드라비다족이 인더스 문명을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원전 1,500년 경에서야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언어가 발견된다고 하는 것은 베딕 산스크리트어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인더스 문명은 쇠퇴하고 있었고, 북쪽에서 내려온 아리안들이 인도에 들어와 주류 문화를 형성한다.

두 가지 주요한 가설이 있는데 인도-유러피안 언어가 코카서스(캅카스) 이북지역, 도나우 강변부터 우랄 산맥 사이의 넓은 평지를 살던 사람들이 그 기원이라는 것과 아나톨리아(현 터키)가 기원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쨌든 그들은 구체적이고 수많은 이야기의 신화와 수준높은 기술적 성취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달마를 단순히 ‘인도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국가주의적 오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인도가 헌법으로 22개의 언어를 인정하고 있고, 현재까지 1,600개의 언어가 유지되고 있다면 인도의 문화는 우리처럼 단일국가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유럽처럼 이해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대륙 안에서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가 서로 매우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달마가 중국에 와서 소위 말하는 선종의 조사가 되는 과정이 훨씬 쉽게 이해된다. 달마가 남인도 드라비다어족 - 타밀어를 사용한 사람이라고 본다면, 그의 의식 구조는 인도-유러파인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성립된 사고방식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인들에게 스며들어 소위 ‘언어로부터의 해탈(도올 김용옥)’을 추구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不識(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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