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잘 다루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상징들을 다시 다루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흔한 상징들과 그 은유들을 조금 다르게 다루어보고 또한 재상징화의 과정을 통한 조금 다른 접근을 발견해 나가는 것은 내 작업의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하나로 나는 ‘물(水, water)’이 상징해 온 것들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그렇게 조금 다르게 떠오른 생각들을 통한 재상징화 작업을 통해 나의 작업들을 구성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인도-유럽어의 전승으로 비슈누의 태고의 바다를, <에누마 엘리시>로 잘 알려진 바빌론의 창조 신화와 <창세기> 속에서 짧지만 확실히 등장하는 ‘물'의 이야기들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고대 인도: 비슈누의 대양(The Ocean of Vishnu)
거대한 바다는 고대 인도의 전승 가운데 자주 잠재된 우주적 대상, 영원성 그리고 창조의 원천 등으로 상징된다. ‘비슈누의 대양'은 우유의 바다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대극(對極)적으로 표현되는 신들(데바들, 아수라들)은 이 바다를 휘젓는 행위로 표현되는 서사 가운데 이 바다로부터 不死(Amṛta - 많은 문헌에서 감로(甘露, the nectar of immortality로 표현됨)를 추출한다. 태고의 바다를 휘젓는 행위는 존재(existence)에 내재하는 대극(對極, polarity)성 가운데 일어나는 어떠한 격렬한 움직임을 상징한다.
<에누마 엘리시>
바빌론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시>는 원시의 바다 ‘티아맛'이라 불리우는 태고의 물로부터 서사의 주요요소를 끄집어낸다. ‘티아맛'은 원시성과 혼돈을 표현하는 물에 부여된 인격이다.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Marduk)은 이 ‘티아맛'을 물리치고 그녀의 몸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만든다. <에누마 엘리시>에 등장하는 물의 상징들은 창조로의 가능성 내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혼돈과 질서라는 두 주제를 얽어맨 상징이기도 하다.
<창세기>
성서(the Bible) 처음에 등장하는 창세기는 창조이야기의 시점에 물의 심상이 놓여있다. 태초에 야훼의 영이 물들 가운데 비행하였다는 표현은 미현현의 잠재성에 관한 표현이기도 하다. 야훼가 물을 가르고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것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행위로 이해된다.
물과 관련해 이들 서사들을 아우르는 상징은 우선 물은 원초적 잠재력의 상징으로 순환성을 표현하며, 생명의 원천이 되고 또한 창조의 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근동의 문헌들과 고대 인도의 서사들 속에서 물은 각각이 달리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고대 인도 전승 가운데 살았던 고타마 붓다의 ‘불사’는, 어쩌면 실재할 수 없고 단지 추상되는 개념들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주관자들 - 데바들과 아수라들 - 과 양극단이 아닌 그것들이 일으키는 운동성이 이 세계의 원리로 전승 속에 담겨 왔음을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슈누의 ‘마야 māyā 幻’
비슈누 마야의 현현과 관련 물을 그것의 상징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 용법과 개념은 그것의 전승을 따르는 사람들이나 학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힌두적 관점에서 보면, ‘마야 māyā 幻’는 현상세계에서 일어나 현실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일종의 환상(幻像)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마야 māyā 幻’를 통해 현현되지 않는 것들이 현현되며 이는 신들이 다채로운 형태를 취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물'은 환상의 상징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물질세계의 변화와 가변성과 관련된 측면을 강조하자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비슈누 대양의 서사는 ‘마야 māyā 幻’와 현상의 저변에 놓인 ‘본질'의 상호작용을 표상하는 은유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 대양을 휘젓는 행위에서 각종 재보들이 비롯된다는 상징들은 존재의 이러한 이중적 본성 - 나타남(‘마야 māyā 幻’)과 저변에 놓인 본질성 - 을 표상한다고 해석 가능한데, 이는 힌두적 관점의 현상세계가 존재하고 또한 경험된다는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층위의, 현현되지 않은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물은 가변성이라는 성질, 반영과 변형이라는 성질들이 ‘마야 māyā 幻’의 개념과 일치한다. 물이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처럼, 물질세계는 ‘마야 māyā 幻’를 통해 드러난 모습이며 때문에 다양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마야 māyā 幻’를 통해 드러난 세계의 모습은 불변하는 존재의 궁극적 뿌리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적 상징들의 해석은 다면적이며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어떠한 관점에서는 물을 우주의 자궁이나 생명의 근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며, 반면 깨끗함과 정화의 역할을 하는 물의 특징들을 강조하는 쪽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을 비슈누의 ‘마야 māyā 幻’를 상징하는 상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상징의 해석과 신화가 내포하는 철학적 맥락에 근거해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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